Day 21: 변화

 

 

 

[로마서 12장 1-3절 말씀 묵상]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장 1-3절).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변화되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배를 수백번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수없이 말해도 변화되어 가지 않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인 목사님들조차 변화되어가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에 한탄하며 포기한 듯 느껴지며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의 입장에서는 변화되어가지 않는 설교자의 모습에 비판과 불만이 끊여지지 않는 듯 합니다.  종교적 예식인 예배는 습관적으로라도 신실하게 잘 감당하는 듯 하지만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변화되어가지 않는 우리 크리스천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예배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한 바른 교리를 아무리 많이 알고 예배를 수 없이 드렸었을지라도 왜 우리는 변화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변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방향으로 변화는가가 중요합니다.  악한 방향으로 변화되든지 아니면 선한 방향으로 변화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악한 방향으로 변화되던지(변질) 아니면 선한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의아하게 들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한 예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예배 가운데 설교자인 목사님을 통해서 듣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방망이와 불 또는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으로 은혜를 받는 설교자 자신이나 성도들은 강팍한 마음이 부서지며 차가운 마음이 녹아지며 마음과 양심에 찔림과 더불어 진정한 회개의 역사와 더불어 세워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는 마음을 강팍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설교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데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오히려 말씀을 들으므로 마음이 강팍하게 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축복이지만 불순종은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변화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주일 예배를 통하여 악한 방향으로 변화를 받는 성도들은 세상에 나가서도 이 세대를 본받을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교인이요 크리스천이요 예배자라고까지 자칭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러한 크리스천의 숫자를 늘려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욕심과 야망은 사람보기에는 어떨런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일이요 싫어하시는 일일 뿐입니다(사 1:13, 1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변화는 우리가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의 삶은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 변화를 받는 가운데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저는 본문 로마서 12장 1-3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세 가지 변화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를 우리 모두가 이 세 가지 변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작년보다 금년 더 번화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마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님께서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1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1장 4절에서 이 세대를 가리켜 “이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2절과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되기 전에는 “이 세상 풍속”(엡2:2) 또는 “육체의 욕심”(갈5:16)을 좇아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되기 전에 좇았던 이 세상 풍속 또는 육체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비슷한 목록이 로마서 1장 29-31절에도 나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를 거역함, 우매함, 배약함, 무정함, 무자비함.  문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사람이 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새 사람 답게 살아 가기보다 아직도 옛 사람의 습관대로 이러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 입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 답게 살아가야 할텐데 아직도 옛 사람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지 않아서 우리는 범죄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11절에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새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두워진 우리의 미련한 마음대로(1:21), 또는 우리 마음의 정욕대로(1:24)  이 죄악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마음에 변화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달란스 윌라드라는 목사님은 그의 책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에서 “외면의 악을 확실히 정복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깊은 변화뿐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여러분들은 외면의 악을 확실히 정복할 수 있는 것이 내면의 깊은 변화뿐이라고 믿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 뿐만 아니라 제 육신의 가정 식구들이던 영의 가정 식구들이 우리 승리장로교회 식구들을 생각할 때 내면의 변화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겉으로 보이는 외면의 변화보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내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제 개인 신앙생활 및 가정 사역과 목양 사역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내면의 변화가 없이는 참된 외면의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내면의 변화는 등한히 하고 외면의 변화에 너무 신경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이 표면적인 변화를 추구하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선한 영향력을 행하기 보다 오히려 거꾸로 세상에 영향을 받아 세상을 본받아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범죄하며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보기에는 참 신앙이 좋아보이고, 기도도 썩 잘하는 것같고, 성경 지식도 있는 것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기에 교회를 수년을 다녀도 성품의 변화도 없고 행함의 변화도 잘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온 승리교회 식구들이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묵상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할 수록 우리의 마음은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 수록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 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롬12:2).  그리할 때 둘째로, 우리는 분별하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벧전1:22).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십니다(엡5:26).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하여 듣고, 읽고, 묵상하며 공부하며 또한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해 지길 기원합니다(온전한 마음).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더욱더 예수님을 본 받아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생각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3절을 보십시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프랑스의 근대 합리론의 철학자 데카르(R. Descartes)의 이 말은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내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입니다.  우리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갑니다.  “먹고 자고 생식하고 죽는다’라는 이 네 개의 단어로 동물의 삶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사고하는 존재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고 이 그 이성을 통하여 우리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며서 살아갑니다(인터넷).  그런데 왠지 우리 사람들이 점점 더 생각하면서 살기보다 동물처럼 충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성과 논리가 결핍된 감정과 충동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허망한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허망하였졌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할찌라도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허망하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의 생각이 무가치하고 헛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허망한 생각 속에서는 무가치한 일, 헛된 일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한 일과 헛된 일이 교회 안에서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교회 안에 “… 음행과 …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갈5:19-21)과 같은 범죄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3절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만한 생각을 품지 말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분쟁과 분리함 등 이런 저런 범죄가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까?  교만함 때문입니다.  영적 우월감 같은 것이 왜 있습니까?  왜 선입감 같은 것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분수에 넘치게 평가해서 그런게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3절에서 한 마디로 ‘분수에 넘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나 저와 여러분들에게 ‘겸손히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하반절).  무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 분수있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알고 겸손히 생각하라는 말씀이요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는 “정신 차려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은혜를 아는 자는 겸손합니다.  결코 은혜를 아는 자는 분수에 넘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겸손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운데 겸손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편지로나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 받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갈 때 우리의 생각 또한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마음의 변화과 생각의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새롭게 되는 마음과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은 결코 주님 앞에서 교만한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새롭게 되는 마음과 복종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생각의 변화가 계속 있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다 겸손히 생각하는 가운데 같은 마음 뿐만 아니라 같은 생각을 품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있을 때 우리의 삶 또한 자연스럽게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까?  더 이상 이 세상의 풍속이나 육체의 욕심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교만한 삶이 아니라 겸손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마음과 생각의 변화 가운데 맺는 삶의 열매는 바로 “거룩”(holiness)입니다.  과연 “거룩”이란 무슨 뜻입니까?  “거룩”이란 히브리어 코데쉬는  부정한 것을 잘라 내어 구분하고 분리한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성도의 삶은 세상과 죄악과 분리된 삶을 가리킵니다.  달리 말한다면, 성도의 삶은 비세속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성도”라는 헬라어 “하기오스”, 거룩함은 “하”라는 부정어와 “개스”라는 땅, 세상이란 단어의 합성어로 비세속적이다는 뜻입니다(인터넷).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세속화 되었습니다.  왜 교회가 세속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세속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우리의 생활 패턴이 전반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고 있는 삶은 결코 성도의 삶,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성도의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Gospel-Powered Parenting”이란 책이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이 우리 부모들을 변화시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지 가르켜 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 4장을 보면 저자 William P. Farley 목사님은 “A Holy Father’란 제목 아래 가정의 우리 아버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아버지들이 거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음: “Such is holiness of the Father that when his Son bore our sin and transgressions, God separated himself from him”[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이란 그의 아들(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그의 아들과 분리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걸머지신 독생자 예수님과도 스스로 분리하신 이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에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는 죄와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죄악된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세속화되어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언행을 일삼아서는 아니됩니다.  오히여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거룩한 삶을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 죄악된 세상에 들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변화, 우리 생각의 변화, 그리고 우리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더욱더 변화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변질이 아닌 변화를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왕궁보다 광야를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