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9: 고난의 유익

 

 

 

[요나 2장 2절 말씀 묵상]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장 2절).

 

 

            우리 삶 속에 주어지는 고난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춤 추시는 하나님”에서 한 네 가지로 반응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를 가리켜 하나님과 춤을 추는 스텝 네 가지라 말합니다.  하나님과 춤을 추는 첫번째 스텝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울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아플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아뢰야 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인정하기보다 부인(deny)하려고 하던지 무시(ignore)하려고 하던지 아니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억누르려고(suppress)하려고 합니다.  만일 그리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을 당할 때마나 원망하며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범죄할 확률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춤을 추기 위한 두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마비시켜 부정과 수치와 죄책이라는 옥에 가둔 은밀한 상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고통과 아픔을 유발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원인이 뭔지 알아야 우리가 그 원인을 직시하던지 안하던지 할텐데 많은 때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할 뿐더러 설상 우리가 그 원인을 안다 할찌라도 우리 인간의 본능은 그 원인을 직시하기보다 피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피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주어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춤의 세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너무나 막대한 에너지를 부정하는 데 쏟아 부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리혀 우리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가운데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의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어둡고 무서울 수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그 터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터널에 들어가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춤의 마지막 네 번째 스텝은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의 터널에 들어가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상실과 상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고통과 상처에 치유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움을 받아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나 2장 1절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가 겪은 고통은 한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의 고난은 큰 물고기 뱃 속이였습니다(1절).  다시 말하면, 요나의 첫번째 고난은 스올의 뱃속이였습니다(2절).  어두컴컴한 동굴처럼 바다 깊은 곳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요나는 동서남북을 다 돌아보아도 아무 해결책이 없어보이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쳐해 있었습니다.  그는 갇힌바 된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바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물론 이것은 바로 왕의 생각이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였지만).  찬송가 539장 3절 가사처럼 이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모두 끊어진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절망 상태에 놓였을 때에야 우리는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둘째로, 요나의 고난은 주님의 파도였습니다(3절).  여기 ‘파도’란 실상 깨뜨리는 자들(breakers)이라는 뜻으로써 곧 자신을 깨뜨려 부수는 파도를 이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강퍅한 마음을 깨뜨려 부서트리고 계셨습니다.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사 요나가 타고 있었던 배만 깨뜨리시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1:4)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강팍한 마음을 깨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던 요나의 강팍한 마음을 주님께서는 깨뜨리시므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님의 명령에 순종케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셋째로, 요나의 고난은 주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였습니다[(4절) “… 내가 주의 목전에 쫓겨났을지라도…”].  요나가 이러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3).  다시 말하면,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자기에게 멀리 떠나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이 듭니까?  우리가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멀리 도망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기도 응답이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22편 1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신음하며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응답이 없고 아무 도우심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버림 받았다는 느낌은 육신적으로 큰 물고기 뱃 속에 있는 것과 주님의 파도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아버지께 징계를 받을 때 어두운 방안에 갇혀 있는 것과 아버님으로부터 몽뎅이로 엉덩이나 종아리를 맞는 것보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버림 받았다는 느낌이 더 괴로운 것처럼 어떠한 징계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제일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십자가 상에서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란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시는 독생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언하며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요나의 고난은 그의 영혼이 그 속에서 피곤해 갔다는 것입니다[(욘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  여기서 ‘피곤하다’란 단어의 뜻은 ‘쇠퇴해가다’입니다.  이 단어는 요나는 극도의 낙심 지경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요나에게 임한 고난의 지경은 전적 무능력함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혹은 구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러한 상황이 삼일이나 되었다는 것은 극도의 낙심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적 무기력함과 전적 무능력함을 경험하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구원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하여금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큰 유익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접하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특히 요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대풍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춤을 추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유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편).

 

 

 

춤 추시는 하나님과 스텝을 맞추는 것을 배우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고난의 유익을 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