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6: “내 마음이 눌릴 때에”

 

 

 

[시편 61편 말씀 묵상]

 

 

            요즘 D.M.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영적 투쟁”(The Christian Warfare)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사랑하는 동역자 한분과 욥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탄의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영적 싸움에 대하여 더 알아야 겠다는 관심과 필요를 느꼈기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욥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귀의 전략 중 하나는 마귀는 어느 정도 자연까지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아래 욥을 치기 시작했을 때에 욥의 종들 가운데 하나가 욥에게 와서 그의 소와 나귀를 빼앗겼으며 지키는 자들은 살해당하였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욥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 하나님의 불이 – 즉 번개가 –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버렸나 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1:16).  여기서 번개를 일으키는 것과 번개로서 파괴시키는 일이 마귀의 영역과 능력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 놀라운 능력을 가진 마귀가 무엇보다도 관심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인 정신을 집중적으로 교활하고 무서운 권세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귀는 여러가지 귀계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정신을 공격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공포의 영으로서 우리를 억누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사도 베드로가 결국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주님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는 마귀가 지극한 공포의 영이 그에게 자기 생명을 잃어버릴것에 대한 공포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요즘 교회에 대하여 이러한 뼈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마취를 당하고 혼미하게 되어 잠에 떨어지고 전혀 그 투쟁(영적 투쟁)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 덫과 올무를 놓고 있는 사단은 지금 교회 안에서 성공하고 있는 듯 해 보입니다.  의기 소침, 낙심, 패배감 그리고 완전한 절망감은 일반적으로 마귀의 활동의 결과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크리스찬들이 의기소침하며 낙심하며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우리 크리스찬들이 절망감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이미 승리하신 주 예수님의 능력으로 싸워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전투적인 크리스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오늘 그 한 예가 본문 시편 61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 다윗은 “내 마음이 눌릴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눌린다”라는 말은 “자포위”(self-enveloping)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여러가지 우고에 싸여서 기진 맥진해 갈고 절망되어 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원수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절망되어 가고 있었던 다윗, 과연 우리가 다윗처럼 마귀의 악한 세력으로 인하여 마음이 눌릴 때에 우리는 어떻게 싸워 이여가 하는지 한 네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음이 눌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61편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언제가 수요기도회 때 시편 42편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낙망과 절망을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회로 삼자고 도전한 기억이 납니다.  인생의 여러가지 역경과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낙망하며 절망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처럼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욱더 갈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힘들고 괴로울 때 하나님이 우리를 갈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본문 시편에 나오는 다윗도 그의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왜 다윗은 “땅 끝에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절망 상태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너무나 멀리 떠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땅 끝에서부터 주님꼐 부르짖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 가운데서도 다윗은 자포자기하며 절망 가운데서 자신을 내어 던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나 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 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은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자기 보다 높은 바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할지라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처럼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찌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바다 깊은 속에서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하였던 요나 선지차처럼(욘2:4)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쳐해 있을찌라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짖눌려 있을찌라도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둘째로, 마음이 눌릴 때에 우리는 주님께 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61편4절을 보십시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우리가 절망 가운데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면서 그 분에게 피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 속에서 마음이 눌려져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3절).  극심한 절망 가운데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 속에서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난처시요 견고한 망대심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오늘 본문 7절 하반절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다윗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난처시요 견고한 망대심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음이 짖눌려 있는 다윗에게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음이 짖눌린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그는 주님께 간구하면서 그에게 피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마음이 짖눌려 있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리를 꼭 붙잡고 놓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약속(혹은 예정)하시고 또한 그 약속대로 신실히(진리로) 이행하실 줄 믿음으로 주님께 피해야 합니다(박윤선).

 

            인생의 절망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인자)와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장막에서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소망에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4절).  순간적인 절망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장막을 바라봐야 합니다.

 

        셋째로, 마음이 눌릴 때에 우리는 과거의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61편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권이 일시 동안 불의한 압살롬 일파에게 갔다가, 다시 다윗의 손 안에 돌아온 것을 가리킵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다윗은 과거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서 하나님께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였던 것입니다(박윤선).  원수로 인하여(3절) 마음이 짖눌려 있을 때에 다윗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한 일을 기억하기보다 과거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본능은 아닙니다.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마음이 눌릴 때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자기 행위나 공로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 예로 우리는 열왕기상19장에 나오는 엘리야를 들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면서 도망하여 스스로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가 천사의 어루만지심과 먹여주심으로 인하여 호렙산에 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있느냐”(9, 13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엘리야의 대답을 보면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10, 14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행한 자기 행위(혹은 공로)를 주장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 중 하나는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 회개한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회개했다는 죄를 잊지못하고 기억하므로 거듭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과거 우리의 삶속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빨리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시편 61편에 나오는 다윗처럼 과거의 우리 삶 속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다윗처럼 우리의 마음이 짖눌릴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뒤돌아 보면서 그 때 그 때 고비마다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믿음으로 견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눌릴 때 지난 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헤의 기억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의 절망이 소망과 희망으로 변해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마음이 눌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61편7절을 보십시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 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다윗은 주님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대에 미치게 하시길 하나님께 간구한였습니다(6절).  그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길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장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거하길 간구하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원수들로 인하여 마음이 눌려 절망가운데 있는 다윗,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 피한 후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므로 소망하되 순간적인 절망 가운데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길 간구하는 모습을 … 우리 또한 다윗처럼 순간적인 절망 가운데서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길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왕중의 왕이신 주님께서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심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 백성들로서 그 나라에 영원히 거하길 간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우리는 또한 “나라에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라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실 때에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계22:20).

 

            다윗은 자기의 마음이 눌릴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에게 피한 후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응답하시사 자기를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주시며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사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게 하시면 다윗은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8절).  우리 또한 다윗처럼 마음이 눌릴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피난처요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주님께 피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과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거하길 소망해야 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가364장)을 찬양한 후,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낙망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더 갈망하는 기회로 삼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