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사무엘하 12장 7절 말씀 묵상]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 (사무엘하 12장 7절).

 

            저는 제 자신을 볼 때 종종 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나고 나서야 늦게나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 등등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제가 늦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제가 주제 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한 후 나중에 대화 내용을 생각해 보면 그 대화 내용이 제 자신에게도 적용이 되는데 저는 다른 사람 얘기하는 것처럼 말을 한 것을 깨닫곤 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 노회 모임을 마치고 저녁 식가 때 몇몇 목사님들과 대화한 내용을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마치 목사님들이 새로운 노회를 가입할 때 이명서를 띠어 오는 것처럼 교회를 옮겨서 우리 교회 오는 성도님들에게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적어도 허락을 받고 와야 한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확신있게(?) 나눴습니다.  그런 후 제 자신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한 적이 딱 한번 밖에 없었는데 그 한번 한 것을 가지고 항상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여러 목사님들 앞에서 했을 때 ‘꼭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게 맞습니다’라고 그분들이 들릴정도로 한 것을 꺠닫고 나서 그렇게 말 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도 제대로 자아성찰 해보지도 않고 말을 한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수 없이 말한 내용 중에 아주 조금이나마 늦게 깨닫게 될 때 저는 제 자신을 좀 더 뒤돌아 보고 그 다음에 조심이 말을 하자고 스스로 제 자신에게 말해 보지만 또 동일한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2장 7절 말씀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의 충성된 군인인 우리아의 처인 밧세바와 동침하고(11:4) 그 간음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는 듯 밧세바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5절) 그 죄를 덮고자 그 잉태한 원인을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에게 돌리고자 간교한 계책을 세웁니다(박윤선).  그 간교한 계책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왕궁으로 불러 들여 그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내려가서 쉬게 하도 음식까지 달려 보냅니다(8절).  그러나 충성된 군인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잡니다(9절).  그래서 다윗은 두 번째 간교한 계책을 세웁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서 저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한 후 자기 집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했습니다(13절).  왜 다윗이 이렇게 두 번이나 우리아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밧세바가 잉태된 아기가 다윗과 더불어 동침하여 생긴 아기가 아니라 부부인 우리아와 밧세바가 동침하여 생긴 아기인 줄로 생각하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 때야 뭐 DNA 시험도 없었으니 그 아기가 다윗이 아기인지 우리아의 아기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우리아는 또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누웠습니다(13절).  그래서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서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14-25절).  그리곤 요압이 보낸 사람을 통하여 전쟁에서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그 사람에게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고 요압에게 말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25절).  어떻게 충성된 자기 군인을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죽여 놓고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죽여 놓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기에(27절)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한 성에 있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를 면책하셨습니다(12:1-4).  그 때 다윗은 크게 노하여 나단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5절).  죄를 덮고 덮으려고 했어서 자기 양심마저 덮어버려서 그랬던 것인지 다윗은 자기가  그 마땅히 죽을 자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면책하였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7절).  이 얼마나 충격적인 면책입니까?  다윗 자신은 분명히 자기 자신은 그 마땅히 죽을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면책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가 우리가 행한 일들이 죄라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춰내실 때 우리의 양심은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나는 그 죽어야 할 사람이 분명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입니까?  자기 죄도 모르고, 자기 주제도 모르는 사람의 분노 가운데 나온 발언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5월 되면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언젠가 가정의 달인 5월에 가정 설교를 했을 때 어느 성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내가 꼭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 ….”  아마 그 때 제가 전파한 말씀의 초점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였던 것 같습니다.  종종 제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제 자신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기보다 이 말씀을 아무게가 들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고 계셨을 터인데 저는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처럼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죄를 면책하는 말씀을 전파할 때 그 성령의 검인 말씀인 제 마음에 비수처럼 꽂혀야 하는데 제 마음 속에서 그 칼날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꽂혀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들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 자신을 영적인 거울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부지런히 비춰보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자아성찰과 자아반성을 게을리할 때 어느 순간에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므로 “내 죄로소이다’라고 고백하기보다 ‘저 사람의 죄입니다’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그 죄를 범한 자인데 다른 사람이 그 죄를 범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 얼마나 교만한 죄입니까?  이렇게 범죄하여 범한 죄를 덮고자 할 때에는 왠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혜조차 내 마음에 덮어버리므로 말미암아 교만함 가운데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면책의 말씀조자 듣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범한 죄를 덮고자 하면 양심도 덮어지고, 은혜도 덮어지고, 귀도 덮어지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아니될 텐데 ….

 

 

 

성령의 검을 의지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들쳐내시는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며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