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참된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로마서 2장 17-29절 말씀 묵상]

 

 

21세기의 선지자로 불리워졌던 A. W. 토저 목사님이 쓴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란 책을 보면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기 진단법”이란 제목의 장이 나옵니다.  거기서 토저 목사님은 진짜 크리스천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자기 발견을 위한 7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밝혀주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도 자신에게 이 질문들을 이 시간이 던져 보시길 바랍니다: 첫째,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넷째,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다섯째,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여섯째,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그리고 일곱째,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토저 목사님은 “누가 가짜인가?”를 8개로 말씀하셨습니다:

 

  1. 가짜는 인스터트이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한 번의 신앙의 행위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의 영적 전진을 갈망하는 욕구를 억압한다.
  2.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세월이 흐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아 아니라 변화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
  3.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나님께 매를 맞아 아플 때 우리는 우리가 잠시 옳은 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야 한다. 반면 십자가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옳은 길에 있음을 말해준다.”
  4. 가짜는 행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행함을 통해서 용서를 얻겠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을 상쇄하려면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할지를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5. 가짜는 신조를 무시한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 없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진리는 명문화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명문화한 것이 곧 신조이다”
  6. 가짜는 신학을 경시한다: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신학이다. 우리는 어렵게 배우고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게 결심하고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7. 가짜는 감정을 등한히 여긴: “우리는 감정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주어진 우리의 정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8. 가짜는 영적 균형 감이 없다: “진리는 새와 같기 때문에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게도 한쪽 날개를 아래로 쑤셔 박은 채 다른 한쪽 날개를 미친 듯이 퍼덕이며 날아보려고 애쓴다.”

 

오늘 본문 로마서2장28-2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표면적 유대인”(a Jew who is one outwardly)과 “이면적 유대인”(a Jew who is one inwardly)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영적 우월감 속에서 이방인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고 정죄(“판단”)하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표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 바울의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과연 참된 크리스천은 누구이며 표면적 크리스천, 즉 겉으로 보기에만 크리스천은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겉으로 보이게만 크리스천’(표면적 크리스천)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표면적 크리스천은 자기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칭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2장17절을 보면 표면적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왜 이 표면적 유대인들은 참된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칭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 유대인들에게는 특권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특별한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자칭하였습니다.  이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별한 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택 받은 백성에게 소속돼 있음(belonging to the chosen people), 율법을 의지함(reliance on the law) 그리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a special relationship with God)(NICNT).  그러므로 표면적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영적 우월감 속에서 한 공동체 안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을 자랑하였습니다(17절).  이러한 자랑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였습니다

 

이와 같이 표면적 크리스천 즉, 겉으로 보기에만 크리스천은 자기들만의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의 가지고 있는 특별한 권리를 교회 안에서 행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표면적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 깊은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영적 우월감, 교만함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은근히 좋아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원하는 것은 자기 영광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갈급해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특권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교회 안에서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1:18-32)와 하나님의 심판(2:1-16)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표면적 크리스천은 스스로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로마서 2장 19- 20절을 보면 표면적 유대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소경 된 자,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 그리고 어린아이를 지도하며 인도하는 선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근데 이 표면적 유대인들은 놀랍게도 자기 자신들이 소경 된 자,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 그리고 어린아이인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무지의 원인은 영적 우월감 곧 교만이었습니다.  이렇게 교만이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듭니다.  영적 교만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뒤돌아보며 자아 성찰하게 하지 않고 다른 성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끄집어 내어 은근히 자기 자신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이 그 성도보다 더 훌륭한 성도임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좀 안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들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래도 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함 속에서 겸손하여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열심이 있는데 좀 성경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은 영적 우월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이들은 교회의 평안을 깨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셋째로, 표면적 크리스천은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2장 21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특별히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유대 신자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자들로서 그 율법을 의지하였고(17절) 또한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줄 착각하며(18절) 교만함 가운데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했습니다.  율법에 나와 있는 데로 도적질 하지 말라(21절), 간음하지 말라, 우상을 미워하라(22절) 등등 가르치는 것은 좋아했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고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늘 본문 23-24절에서 이렇게 면책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겉으로 보기엔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 그러기에 가르치는 교훈도 성경적이지만 왠지 ‘위선적 이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남은 잘 가르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을 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젠가 저희 집 막내 예은이에게 “인내”가 ‘waiting nicely’(잘 가디리는 것)라고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자신에게는 인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성경적 교훈을 가르치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 이전에 제 자신이 부모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제 자녀에게 인내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였으니 그 자녀의 마음에 감화를 주지 못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의 교훈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동기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능욕에서 난 것이다.  그런 교훈은, 피교육자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고 도리어 반감을 일으킨다.”

 

마지막 넷째로, 표면적 크리스천은 외면적 생활을 위주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율법과 할례 이 두 가지에 대해 말씀하면서 율법을 가지고 있고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3절).  만일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할례가 아무 유익이 없는 “무할례”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5절).  이렇게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특권의식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들의 자부심 또는 자랑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율법(the Law)과 할례(circumcision)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과 할례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의 증표이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엄청난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문제는 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랑삼고 그것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정죄하는 영적 우월감,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표면적 크리스천, 즉 겉으로만 크리스천답게 보이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외면적 신앙생활에 취중 하다 보니 외식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 앞에서 보이는 크리스천의 삶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참된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참된 크리스천은 표면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이면적 크리스천입니다.  이면적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면적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2장 29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진정한 이면적 유대인은 ‘성령님께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진정한 참된 유대인 또는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므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지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로마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특별히 말씀하였던 이유는 유대인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라는 사실보다 조건적, 즉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십자가의 공로보다 인간의 공로를 더 의지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편지로나마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면적 크리스천, 즉 참된 크리스천은 에베소서2장8-9절 말씀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참된 크리스천은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압니다.  결코 자신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면적 크리스천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삽니다.

 

결코 이면적 크리스천은 표면적 크리스천처럼 율법에 대해서나 할례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교만함 가운데서 입술로만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말로 떠드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세상에 나아가서도 입술로만 ‘나는 교회 다닙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등등 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빛을 들어내는 삶을 삽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우리는 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좀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빛 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성가 가사처럼 ‘입술로는 예수님을 닮은 듯 한데 우리의 행동이나 삶을 통하여서는 예수님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살아 있는 바른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면적 크리스천은 외면적인 생활에 치중하기보다 내면적인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이면적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칭찬 받는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29절하).  이들에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고자 힘씁니다.  참으로 내면을 가꾸는 신앙생활은 아름답습니다.  한국 삼일 교회 전병욱 목사님의 설교 요약 중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인터넷): “신앙의 본질은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신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사람을 의지하고 좋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세계 속에서 믿고 있는 바를 따라 사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껍데기로서의 삶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다.”

        

찬송가 518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란 찬송이 생각납니다.  이 찬송 가사를 보면 “진심으로”라는 말이 20번이 나옵니다.  진심으로 “신자 되길 원합니다,” “사랑하길 원합니다,” “거룩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닮기 원합니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 해설을 찾아 보니까 이 찬송은 흑인 영가라고 합니다.  흑인영가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얼굴 색깔이 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노예로서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다 당한 흑인 노예들의 신앙적 바램과 정한이 오랜 세월을 거쳐 노래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합니다(인터넷).  과연 노예로서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다 당한 흑인 노예들이 어떻게 유대인 신자들처럼 영적 우월감 속에서 자기들이 진정한 신자라고 말하면서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외면적으로 무엇을 내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마음 중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간절히 마음으로 “진심으로” 신자 되길 원합니다”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은 표면적 크리스천이 아니 이면적 크리스천이 되길 기원합니다.  진심으로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줄 알길 바랍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랍니다.  외면이 아닌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참된 신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참된 크리스천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

(예수님을 닮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