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죽음이 끝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0장 31, 35절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사도행전 20장 31, 35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심어주시고 계시는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 인생관 중 하나는 바로 사람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제 마음에 심어주시는 관점은 죽음의 관점입니다.  전도서 7장 2절을 보십시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그래서 저는 비록 지금 저는 살아 있지만 장차 다가 올 죽음을 생각하면서 죽음의 관점으로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드려야 하는지 기도하며, 고민하며,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사도행전 20장 17-38절 말씀을 새벽기도회 때 전파한 후 기도하는 가운데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죽음 후의 세계가 있음을 믿기에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은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후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죽음이 끝은 아닙니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도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육신의 가정 식구들이나 영의 가정 식구들인 교회 식구들에게 심어주고 떠나는 추억들이 있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만남들인 가정, 친척 식구들과 교회 식구들, 그리고 친구들, 이웃들 등등과의 만남 가운데 우리는 이 모든 이들에게 추억을 남기고 떠나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비록 우리는 우리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인 천국으로 가지만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은 우리들에 대한 추억들을 마음에 품고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이기에 우리의 죽음이 끝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죽음이 끝은 아니다라는 이러한 관점을 가지게 될 때 저는 남은 이 땅에서의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드려야 할지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무릅을 끓고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에게 심어주고 계시는 인생관 중 또 하나는 바로 “인생은 추억 만들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특히 우리는 주어진 만남의 시간 동안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추억을 만들어 갑니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갈 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원치않는 안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하시는 만남들 가운데서 과연 상대방 사람들에게 어떠한 추억을 심고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심어지는 추억들이 우리가 죽어도 그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가정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 가족 식구들에게 좋은 추억들을 심어줄 수도 있고 또한 동시에 안 좋은 추억들도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원치 않는 안 좋은 추억들보다 주님 안에서 좋은 추억들을 우리 식구들의 마음에 심어주고 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 식구들은 우리가 죽어도 그들 삶 속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반대로 우리가 우리 식구들에게 안 좋은 추억들을 더 많이 심어주고 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는 죽어서도 그들 삶 속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이 새벽에 “죽음이 끝은 아닙니다”라는 생각이 들은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사도행전 20장17-38절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한 후 이 아침에 이렇게 다시 본문 말씀을 묵상합니다.  특히 31절과 35절 말씀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구절을 보면 “기억하라”(31절)와 “기억하여야 할찌니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삼년간 있으면서(31절) 에베소 성도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므로(18절) 그들 마음에 어떠한 추억을 심어주었기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기억하라’고 하는지 한 두 가지로 다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17절) 그들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 장로들에게 자기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31절).  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바울은 자기가 에베소를 떠난 후 “흉악한 이리”가 그들에게 들어와서(29절) 그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어그러진 말을 하므로(30절) 결국은 에베소 교회 “양 떼”(29절)를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단들이 들어와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여 그들 중 이단에 넘어가 어그러진 말을 하면서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 줄 알았기에 그는 에베소 교회 감독자들인(28절) 장로들에게 자기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심정을 과연 저와 여러분은 좀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바울의 심정을 좀 헤아려보고자 제 가정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가정에 가장으로서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을 이 세상에 두고 만일 제가 먼저 떠나야 한다면 그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 과연 제가 제 아내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세 자녀를 다 맡기고 떠나는 마당에 과연 제가 제 아내에게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하였던 것처럼 권면할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아마 저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억하시오, 사랑하는 아내.  내가 당신과 우리 아이들과 함께 했던 오늘날까지 시간에 무엇을 심어주려고 했는지 기억하시오.  나는 당신과 우리 세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오.  그것을 기억하시길 바라오.  그리고 내가 떠나도 당신이 더욱더 두 배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길 바라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이 세 아이들 마음에 심겨질 수 있길 바라오.’  이렇게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는 결혼 전부터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앞으로 주님께서 이루게 하실 가정을 위하여 기도한 두 가지 기도 제목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대방 배우자를 사랑하게 하옵시며 그 상대방 배우자도 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으로 제 아내나 제 세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2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심어가야 합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제 아내나 제 자녀들에게 성경을 사랑하며 그 성경에 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며, 순종해 나아가도록 지도해야 할 책임이 저에게 있습니다.  과연 이 책임을 저는 죽음의 관점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리고 영적인 가정인 승리교회 식구들에게 신실하게 감당하고 있는지 …  이 책임이 막중함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는 이 아침입니다.  과연 제가 바울처럼 제가 떠난 후 저의 육신의 가정이나 영적 가정인 교회 식구들 가운데 사단의 유혹인 이단의 침투와 미혹을 알고 그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쳤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라고 간절히 권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 있는 가정과 교회가 되야 할텐데, 그래서 어떠한 사단의 미혹이 있을찌라도 예수님께 등돌리지 않고 믿음 생활을 신실하게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잘 해야 할텐데, 과연 그러한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과연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 바울처럼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하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제가 죽어도 과연 제 자녀들과 교회 식구들이 제가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기억하고 있는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믿음 생활을 신실하게 하면서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제임스”라는 존재를 잊어버려도 하나님께서 “제임스”라는 남편, 아빠, 목사를 통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영적 투쟁을 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저는 행복한 남편이요 아빠요 목사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축복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삼년 있을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던 것처럼(20절) 저 또한 식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주어진 시간 동안에 그들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 가르쳐야 할 것을 교훈 받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주님과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였던 것처럼(32절) 저 또한 사랑하는 주님의 몸된 승리장로교회 식구들과 가족 식구들을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든든히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침에 저는 다시 주님 앞에 헌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육신의 가족 식구들과 영적 가족 식구들인 교회 식구들에게 부지런히 심어주는데 저는 헌신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심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35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자기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삼년을 같이 하면서 범사에 모본을 보인 것을 말씀하면서 그 장로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범사에 모본을 보였다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바울은 자기는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33절).  한 마디로, 바울은 탐심하지 않았다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탐심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순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탐심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여기서 정반대란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자기와 자기와 동행들의 쓰는 것을 자기 손으로 일했습니다(34절).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여 주었습니다(27절).  바울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20절).  그는 에베소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해 주었습니다(21절).  바울은 입술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시험을 참으면서 주님을 섬겼다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19절).  그리고 그는 비록 성령님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22절) 성령님께서 각 성에서 그에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면서도(23절)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바울은 자기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이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본을 보인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바울의 삶의 모본을 생각할 때 제 아버님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또 고 헨리 나우웬의 첵 제목인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 때 두 번 불렀던 찬송가 507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는 개인적으로 가정을 놓고 결혼 전부터 기도해 오는 두 가지 기도 제목 중 또 하나의 기도 제목은 ‘상대방 배우자(지금의 아내)가 제 안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저 또한 그녀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소서’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해 오면서 앞으로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기도하며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죽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면 저는 그 것이 제가 제 가족 식구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 때도 찬송가 518장 특히 4절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를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인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본 받는 자의 사역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는 삶아 있었을 때 예수님의 삶의 모본을 보이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심어준 좋은 추억들이 죽은 후에도 그들의 마음에 역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살아있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우리는 보배롭게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마음에 많이 심겨져 있는 사람은 참 축복의 사람이요 참된 부자입니다.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의 곁으로 가야 할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하시는 만남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만남들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어 나아가는데 헌신해야 합시다.  비록 우리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만남들 가운데 안좋은 추억들이 서로에게 줄 수 있을찌라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좋은 추억들을 더욱더 많이 만들어 가는데 헌신하므로 그 좋은 추억들로 하여금 안 좋은 추억들을 덮어 나아는 삶을 추구해야 합시다.  그러한 가운데서 결국 서로 헤어질 때가 점점 다가올 때 우리는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좋은 추억들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렇나 선한 영향을 서로에게 끼치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뜻이 하늘에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즉, 우리는 주님을 겸손히, 눈물로, 인내로 섬기며 또한 주님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침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러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짐을 준비해야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순간적인 이별을 준비해 나아가야 합니다.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만남들 가운데 예수님의 향기를 들어내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죽음 후에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에게 이러한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랑하는 양가 부모님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