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마음이 정결한

 

 

 

[ 73편 말씀 묵상]

 

 

            언젠가 새차를 구입했을 때 그 차를 잘 관리하려고 저는 제 아이들보러 차 뒷 좌석에서 음식을 먹지 말라고 권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1년 동안은 별 문제 없이 차를 깨끗하게 잘 관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제 첫째 아들인 딜런(Dillon)이가 제 차 뒷 자석에서 ‘우왁’하고 그만 토를 왕창해 버렸습니다.  아마 그 전날 밤부터 속이 안좋아서 잠을 못자더니 결국 딜런은 제 차 안에서 토를 해 버린 것입니다.  그 때 제 첫째 딸 예리는 냄새가 지독하다고 손으로 자기 코를 틀어막았습니다.  그리고 제 막내 딸 예은이도 냄새가 난다고 자신의 불쾌한 심정을 약간 토해냈습니다. 하하.  그 때 감사하게도 주유소(gas station)가 근처에 있어서 저는 급히 그리로 운전하고 가서 딜런의 뱃 속에서 나온 냄새나는 그 모든 음식물들을 물수건으로 다 치우고 차 바닥과 좌석을 다 닦았습니다.  저는 이 일로 인하여 생각난 예수님의 말씀이 있어서 제 아이들에게 그 말씀을 가르쳐 주고자 대화를 하였습니다.  저는 음식이 우리 안에 들어갈 때에 그 음식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지만 속 안에서 나오는 것은 이렇게 냄새가 나고 더럽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생각, 거짓말, 질투와 시기 및 죄악된 것들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잘 지켜야 할 것을 저는 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자 시도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 마음을 잘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것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너무나 우리 마음을 오염시키고자 하는 죄악된 것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맡고 만지고 하는 것들 중 너무나 우리 마음을 미혹하며 더럽히고자 하는 죄악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된 것들이 많은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의 청결함을 지켜 나아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8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복된 자들이 되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73편을 보면 시편 기자 아삽은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절).  그러나 아삽은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2절).  왜 그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습니까?  과연 마음의 정결함(purity)을 지키려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는 시험 중 우리를 거의 실족케 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한 3가지로 시편 기자 아삽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첫째로,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므로 말미암아 실족할 뻔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질시할 뻔하였습니다.  이러한 아삽의 질시 (시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언젠가 어떤 나이 많으신 성도님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난하여서 힘든 생활을 해야 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별 고생 없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마도 이 성도님은 이 고민을 많이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은 이 성도님만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위험한 이유는 사단은 이러한 고민 중에 있는 성도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질시를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아삽처럼 악인의 형통함을 질시하게 됩니다.  과연 악인의 형통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이 없다는 것입니다(5절).  또한 악인은 몸이 건강합니다(4-5절).  그리고 악인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을 더합니다(12절).  이 얼마나 의인이 충분히 부러워 할만한 것들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충분히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저런 사람도 저렇게 고통, 고난 없이 몸도 건강하고 잘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항상 힘든 고통과 고난을 격을 때로 겪으면서 몸은 쇠태어져 가고 있는가?’. 

 

둘째로, 아삽은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실족할 뻔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만함 또한 목격하였습니다.  악인의 교만함은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행동의 교만입니다.  이것은 악인들의 강포 (violence)를 가리킵니다.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입니다(6절).  이것은 곧, 그들의 모든 행동과 표현은 남을 압제하며 착취하는 포학 뿐이라는 뜻입니다(박윤선).  둘째로, 악인의 교만함은 마음의 교만입니다.  이것은 악인들의 눈이 높아짐(haughty eyes)을 가리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배가 부르면 어떻게 됩니까?  눈이 높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상상력이 한계가 없어져서 욕심가운데 재물을 쌓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재물을 취하는 고로 예산보다 많은 수입도 생기게 됩니다(박윤선).  셋째로, 악인의 교만함은 입의 교만입니다.  이것은  입의 죄를 범함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란 말씀은 자기가 하늘처럼 높은 듯이 자긍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라는 말씀은 가는 곳마다 악담을 위주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악인은 두루 다니며 그의 교만함 가운데 자긍하며 악담을 합니다.  이 악인의 모습을 볼 때 고통 당하는 의인은 충분히 실족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아삽은 악인을 좇는 백성들로 말미암아 실족할 뻔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10-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편 기자 아삽이 목격한 것은 악인들의 악한 생각, 그 교만한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모방하는 당파가 생겨 악인을 좇는 무리들이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삽은 이것을 보았을 때 거의 실족할 뻔하였습니다.  악인들을 모방하는 이들은 배교하여 그들이 믿어 오던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의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삽에게 있어서 힘든 도전입니까?  악인을 좇는 배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았을 때 아삽은 분명히 조금이나마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 때에 악인에 대한 아삽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였습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12절).

 

          이러한 악인의 형통, 즉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는 것을 볼 때에 과연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습니까?  힘 빠지지 않으시겠습니까? 화를 낼 것 같지 않으십니까?  혹시 악인들을 마음으로 욕할 것 같지는 않습니까?  이 악인의 형통을 보고 아삽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첫째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정히 한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였습니다[(13절)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둘째로, 아삽은  자신의 곤고한 삶을 한탄하였습니다[(14절)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결국 의인 아삽의 마음에 불평을 일으켰던 요소는 악인들은 형통하는 반면에 의인 자신은 곤고에 빠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박윤선).  이러한 생각, 곧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곤고함을 보았던 아삽은 어떻게 했습니까?  먼저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삽은 자기의 짦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복잡성‘을 해결하여 보려고 애썼습니다(박윤선).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마음을 심히 곤란하게 하였습니다[(16절)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이러한 곤란 가운데서 아삽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할 때  그는 3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아삽은 악인의 결국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악인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파멸(18절), “황폐”(19절), “전멸”(19절) 그리고 “멸시”(20절)입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악인의 형통은 잠깐입니다.  그들은 멀지않아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주무시듯이 그들의 악행을 오래 참으시다가, 때가 이르면 깨신듯이 그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둘째로, 아삽은 의인의 결국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시편 73편 24절을 보십시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우리 의인의 결국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18절에서 우리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셋째로, 아삽은 자신의 우매 무지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22절을 보십시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렀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과거에 악인의 형통을 보고 질시하던 아삽, 그리고 질심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산란하며 심장을 찌르는 고통스러운 불평을 품었던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짐승”같이 어리석었던 자라고 자책하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감으로 악인의 결국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 아삽은 오늘 본문 시편 73편 23-28절에서 한 세 가지로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아삽의 첫째 고백은 "주께서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악인의 형통함과 교만함과 악인을 좇는 백성들을 보고 거의 실족할뻔 하였던 아삽은 그 와중에서도 주님께서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주시므로 말미암아 실족치 아니하고 도리어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24절).   여기서 아삽을 인도해준 주님의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아삽에게 성소에서 보여주신 악인의 결국과 의인의 결국이었습니다. 의인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의인에게 내세에서의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삽의 둘째 고백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아삽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어떤 고난에 처하든지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신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아삽의 셋째 고백은 “ 밖에 나의 사모할 없나이다”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3편 25절을 보십시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난 마음이 정결한 성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 성도는 교만한 가운데서 죄를 범하며 재물을 탐하고 고난과 고통을 피하여 욕심가운데서 자기 배만 채우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성도는 악인의 결국과 의인을 결국을 알아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원치 않고 오직 주님만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찬송가 102장이 생각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 (명예; 행복)과 바꿀 수 없네 …

            1절.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절.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말 뺏지 못해

            3절.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마음이 정결한 아삽을 거의 실족케 하였듯이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형통을 질시하게 하므로 우리를 실족케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악인을 쫓는 백성들로 보게 하므로 우리를 실족케 만들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시편 기자 아삽처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악인의 결국과 의인의 결국을 깨닫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삽처럼 우리의 우매 무지함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또한 아삽처럼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리고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아름다운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고 싶은,

 

제임스 목사 나눔

(아삽의 고백이 나의 고백임을 고백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