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생각하십시다!

 

 

 

[전도서 111-8절 말씀 묵상]

 

 

저는 금년 한 해를 뒤돌아 볼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특히 교회적으로 생각할 때 저는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 김 집사님에게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생각할 때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장인 어르신의 삶을 연장시켜 주신 것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분을 생각할 때 부족하나마 깨닫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깨달음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은 김 집사님이 중환자실에 누워계실 때, 그 분을 방문하고 문 쪽으로 나가고 있는데, 부인 집사님이 저에게 오셔서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할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 집사님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해 주셔서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제 장인 어르신도 담당의사에게 사망선고를 받으셨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하시사, 이렇게 건강이 좋아지시는 것을 볼 때 참 놀랍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집사님이나 제 장인 어르신이나 각자 담당의사에게 사망선고를 받으셨을 때를 저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이 만일 그 분들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만일 의사가 저에게 ‘남은 삶이 6개월 미만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저는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갈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두 가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 가지는, 오래 전 대학교 때 친구를 통해 들은 예화입니다. 그 예화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수도원장이 와서 ‘너희들 만일 내일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다들 ‘전도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경을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기도를 더 많이 하겠습니다’ 등등 이러한 답변들을 했는데 한 수도사는 ‘내일도 축구를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제가 내일 죽는다 하여도 지금까지 해오던 것 계속 신실하게 감당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난 것이 바로 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선배이신 고 이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섬기시전 교회에서 설교하시다가 토하시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셨다는 소식도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신 이 목사님을 생각할 때, 저 또한 죽는 그 날까지 제게 맡겨주신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들었습니다.

 

오늘 성경 전도서 11장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찌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 찌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지금 솔로몬 왕은 저와 여러분에게 “캄캄한 날이 많으리라 그 날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그날’, 곧 ‘캄캄한 날’은 무슨 날을 가리킵니까? 그 날은 바로 죽을 날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지금 그는 저와 여러분에게 죽을 날이 올 것을 내다보고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캄캄한 날, 곧 죽을 날을 생각하며(내다보고)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믿음으로 신중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1장 2, 5, 6절 석절을 보면, 동일한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2절), “네가 알지 못함 같이”(5절), “알지 못함이니라”(6절)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우리가 무엇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미래입니다. 그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을 보십시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형통한 날도 주시지만 곤고한 날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알 수 없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걱정 근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미래를 아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7:14). 그리고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우리의 삶을 계획해서 살아가야 합니다(위어스비). 결코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아무 계획 없이 무턱대고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한 번 살도록 해 주신 삶을 우리는 신중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은 특히 구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죽을 날을 내다보면서 우리의 이웃을 힘써 구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구제해야 합니까?

 

(1) 우리는 인색함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1장 1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여기서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웃을 구제하되 인색함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은 그 날, 즉 캄캄한 날인 죽을 날을 내다보면서 살아가되 인색함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구제의 삶을 살되 아무 보상을 바라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구제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왜 우리가 구제하는 그 사람들에게 아무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갚아주심을 믿고 바라기 때문입니다(1절하).

 

(2)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1장 2절을 보십시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말은 할 수 있는데 까지 많은 방면에 자비의 일을 실시하라는 뜻입니다. 혹은 될 수 있는 데로 많은 사람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박윤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절하).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바 주어진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이웃을 구제하면서 많은 자비를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언제 우리가 어떠한 재앙을 만나 더 이상 다른 이들을 구제할 수 없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듯이 폭풍우로 나무가 넘어지면 그 자리에 그냥 있듯이 이 땅에 재앙이 임하면 사람은 별 수 없이 자기 당할 일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3절)(박윤선). 과연 우리는 언제 이 땅에 또한 우리에게 재앙이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언제 임할지 모르는 재앙을 걱정하면서 남을 섬기며 구제하는 일을 주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11:4). 무슨 말씀입니까? 장차 올 재앙을 걱정하면서 다른 이들을 구제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을 따지다보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구제할 수 없기에 믿음으로 다른 이들을 구제하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의 장차 일어나 일을 모르는바 우리는 하나님께서 형통의 날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어 구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언제 저와 여러분의 삶에 곤고한 날이 이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전7:14).

 

셋째로,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1장 5-6절을 보십시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바람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의 뼈가 어떻게 형성되고 자라나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 시절(‘아침’)에 의를 위하여 물질로 하나님 봉사의 일을 힘쓰고 노년 시절(‘저녁’)에도 그리해야 됩니다(박윤선). 우리는 마치 농부처럼 청년 때나 노년 때나 평생 우리의 삶 속에서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되 우리는 울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시126:6). 그리할 때 우리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의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즉, 우리는 청년 때나 노년 때나 부지런히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열매를 맺게 하실지 우리는 알 수가 없기에, 손을 놓지 말고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의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저는 오늘 오후에 저희 교회 히스패닉 사역 담당 목사님이신 고메즈 목사님을 통하여 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한 히스패닉 형제가 멕시코로 이사 간 후 마켓을 보다가 강도를 만나 등에 총을 맞아 하바신 마비가 되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부인은 참 신실하게 우리 교회를 섬겼던 자매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나이가 한 34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한 두어 시간 있다가 또 다른 소식을 한국에 있는 지체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번 안식월 때도 한국 나갔을 때, 저희 가정을 식사 대접해 주시고, 집으로도 초청해 주셔서 함께 대화를 나눴던 권사님 한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권사님에 대한 제 기억은 그 권사님이 교회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목에 뭐가 걸리셨는지 크게 소리를 내시면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그 권사님의 등을 두들겨 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분도 어젯밤인지, 오늘 새벽인지 잠드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죽을 일이 쌓인 세상이 아닐 수 없음을 또 다시 느끼는 오후였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드려야 합니까? 우리는 그 날, 캄캄한 날, 즉 우리의 죽을 날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신중하게 살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처럼 이웃을 사랑하되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면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실로 아름다운 삶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기쁨의 삶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죽을 날을 내다보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고 원혜영 권사님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