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폐단

 

 

 

[전도서 105-7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요즘 TV를 보실 때 무슨 광고를 자주 보십니까? 저는 이번 11월 2일에 있는 미국 중간선거에 관한 광고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고 광고들 중에 특히 한 3가지에 관심을 좀 갖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캘리포니아 상원 선거전과 주지사 선거전,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Prop 19(제안 19)입니다. 제가 Prop 19에 관심을 갖고 광고뿐만 아니라, 뉴스를 보는 이유는 우리가 마약으로 여기는 마리화나(대마초)에 관련된 법률개정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에선 마리화나를 합법화하여 취미로 어느 정도만 사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하는데, 이번 주 뉴스를 보니까, 지금 합법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한 40% 정도, 그리고 합법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한 44%인가 였습니다. 이 Prop 19 외에 아무래도 제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으니까, 상원이나 주지사 선거에 대한 광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공화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들의 TV광고를 보면 이것은 거의 상호 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합니다. 저처럼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이 캘리포니아를 앞으로 이끌 지도자들이 누구인지는 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되서 나눕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나라나 한 주나 바른 지도자가 세워지는 게 참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목회자로서 교회에 중요한 직책을 맡는 교회 직분자를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어떠한 지도자를 교회에서 세워야 합니까? 저희 교회가 추구하며 세우길 기원하는 지도자는 나 중심이나 사람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된 지도자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지도자로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순종하되 겸손히 그리고 신실하게 순종하는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 저희 교회 비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전을 향하여 나아감에 있어서 어려운 점들 중 하나는 인격과 삶의 변화의 결핍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은 요즘 교회에서는 인격과 삶의 변화가 결핍된 사람들을 교회의 직분 자들로 너무 함부로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요즘 교회가 자격 미달이 되는 사람들을 함부로 장로, 안수 집사, 권사에 세우므로 말미암아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깨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죄악 된 일이 우리 장로교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원인은 장로교회의 핵심 지도부인 당회 원들(목사와 장로들)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저 같은 목회자가 문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은 우리 목회자들이 지혜롭지 못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0장 5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한 가지 폐단’하면 이미 우리는 전도서 6장 1절에서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서 본 한 가지 폐단에 대해서 묵상하였습니다. 그 한 가지 폐단이란 바로 사람에게 중한 것, 즉 사람에게 무거운 것으로서 하나님께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다 받아 마음에 소원이 부족함이 없지만,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기가 본 이 한 가지 폐단 이전에 전도서 5장 13-20절에서 ‘큰 폐단’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폐단’은 다름 아닌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13절). 더 나아가서, 그가 본 것은 그 소유주가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재물을 지켰는데 결국 재난을 만나서 모든 재물을 잃어버리므로 말미암아 자기 자녀들에게 아무 것도 물려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폐단입니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뭐 때문에 그리 자기 자신을 해할 정도로 모든 재물을 지킵니까? 결국 재난 만나서 그 모든 재물을 다 잃어버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도 이러한 큰 폐단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서 본 한 가지 폐단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이었습니다(10:5). 여기서 우리가 주권자의 ‘허물’을 논할 때, 우리는 이미 묵상한 전도서 10장 4절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전도서 10장 4절을 보십시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솔로몬 왕은 옳지 않은 주권자가 불의하게 우리를 취급하므로 우리의 분을 일으켜도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그에게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기가 우리의 주권자에게 대항하므로 더 큰 허물, 즉 더 큰 죄를 하나님께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0장 5절에서 솔로몬 왕은 또 다시 ‘허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허물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입니다. 그러면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주권자의 허물은 무엇입니까? 그 허물은 다름 아닌, 주권자의 미련함에서 나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의 한 예를 오늘 본문 6절에서 우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무슨 뜻입니까? 미련한 주권자는 미련한 자들을 높은 위치 혹은 높은 직책에 두고 ‘부자’는 낮은 위치 혹은 낮은 직책에 둔다는 뜻입니다(위어스비). 여기서 ‘부자’를 낮은 위치·직책에 둔다고 말하면, 우리는 지금 현실은 부자가 오히려 교회에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부자’란 지혜로운 자를 가리킵니다(월볼드). 성경 잠언 14장 24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저는 이 주권자의 미련한 결단을 생각할 때, 한 나라에 적용한다면 옳지 않은 대통령이 자신의 미련함 속에서 미련한 자를 나라에 높은 지위에 세우고 지혜로운 자를 낮은 지위에 세운다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옳지 않은 사장은 종업원들을 불의하게 취급하여 그들을 분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들을 높은 위치에 세우고 지혜로운 자들을 낮은 위치에 세우는 이유는 그 사장의 미련함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교회 직분을 함부로 세우고 있는 교회 현실을 볼 때, 우리 목회자들이 좀 더 넓게 우리 장로교에 적용한다면, 우리 당회가 지혜롭지 못하여(미련하여) 교회에 중요한 직책을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오히려 이런 저런 합리화시키는 이유로 자격이 너무 미달한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겨야 할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나 장로가 볼 때, 참으로 회중에서 추천할 만한 사람이요 또한 교회에 존중받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겨야 합니다(참고: 롬16:1-6).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교회가 함부로 ‘장로직’, ‘안수 집사직’, ‘권사직’을 주므로 말미암아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들을 교회 안에서 계속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이유는 알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미련함 때문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주권자의 변덕스러움’ 때문입니다(월볼드). 교회를 예로 든다면 저 같은 목회자가 변덕스러워서 자격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교회의 중책을 맡기지 않고,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주권자의 미련함이란 그가 너무나 고분 고분하는 것(잘 휘어지는 것) 때문입니다(위어스비). 그리고 주권자가 너무나 고분고분하면 그는 인격과 용기가 부족하여 직책을 맡김에 있어서 정반대로 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높은 직책을 그리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낮은 직책을. 교회를 예를 든다면 목사와 장로인 당회가 고분고분하여 용기 있게 옳은 일을 추진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한 나라의 대통령인 주권자가 그의 미련함 가운데서(그것이 변덕스러워서이든 고분고분해서이든) 지혜로운 자를 크게 높은 지위를 주지 않고,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그 높은 지위를 줄 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10장 7절을 보십시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한 나라의 주권자인 대통령이 그의 미련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과는 그 나라에 질서가 깨지고 평화가 없으며, 그 나라가 견고히 세워져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종들이 말을 타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마땅히 말을 타고 존경을 받아야 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면서 그 나라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저는 이 원리가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 다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 가장이 남편인데 아내가 자기가 가장인 듯 행세하며, 그 가정의 질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땅히 성경은 아내들이여 남편을 존경하고 순종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오히려 역할을 바꾸어 자기가 가장인 듯 착각하여 존경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는 사장님과 종업원이 있는데, 종업원이 사장님 자리에 앉아서 모든 존경을 다 받고 사장님이 종업원의 자리에게 일을 한다면, 그 회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안수 집사가 있는데, 자기 위치와 역할을 모르고 선(boundary)을 넘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는 질서가 깨져서 평화가 없으며, 견고히 서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련한 주권자로 말미암은 허물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허물을 교회의 목사님에게서 그리고 회사에 사장님에게서 또한 가정에 가장인 남편(혹은 아버지)에게서 보고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에 이러한 미련한 대통령을 국민들이 세우는데 허락하실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미련한 주권자의 허물을 통하여 한 나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에 미련한 대통령을 통하여, 한 교회에 미련한 목사를 통하여 그리고 한 가정에 미련한 가장을 통하여 그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그 미련한 대통령이나 목사나 가장이 자격 없는 자들을 주장하는 높은 지위에 앉게 하므로 말미암아, 한 나라와 교회와 가정의 질서와 화평을 깨는 것을 허락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한 가정을, 한 교회를 그리고 한 나라를 치리하는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미련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므로 말미암아 지혜롭게 생각하며 또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지혜로운 자를 중요한 직책을 맡겨야지 미련한 자에게 함부로 중요한 직책을 맡겨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자를 존경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나라와 교회와 직장이 주님 안에서 견고히 서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과 교회, 또한 이 나라와 민족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지혜로운 지도자로 세움을 받아 지혜롭고 가능성 있는 그리스도 중심된 일군들을 알아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