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지혜자

 

 

 

[전도서 913-18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부(Wealth)’와 ‘지혜(Wisdom)’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는 것’과 ‘가난하지만 지혜를 얻는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스스로 던져보았을 때, 구약 성경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나발과 아비가일 부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나발이란 사람은 심히 부하였습니다. 그는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나 가지고 있던 부자였습니다(2절). 그러나 그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했을 뿐만 아니라(3절) 불량한 사람이요(17절) 또한 미련한 사람이였습니다(25절). 그의 미련함은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조차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25절). 그와 대조적으로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이란 여인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3절). 그녀는 자기의 미련한 남편 나발이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으므로 말미암아(21절) 다윗이 나발과 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17절) 급히 떡과 포도주, 양과 곡식 등을 나귀들에게 싣고(18절) 다윗에게로 나아가(20절) 다윗으로 하여금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막았습니다(33절). 그리했을 때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32-33절). 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은 전도서 4장 13-1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솔로몬 왕은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과 부하지만 늙고 둔한 왕에 대해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가난함과 부함, 젊고 늙음, 소년이든 왕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 두 성경 말씀을 생각할 때, 저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부’가 아니라 바로 ‘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혜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기보다 가난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이란 대접을 받기보다 배척을 당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부보다 지혜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13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여기서 솔로몬 왕이 보고 크게 여긴 지혜의 한 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그 작은 성읍을 에워싸고(포위하고) 큰 흉벽(큰 포위작전 일들)을 쌓고 치고자 할 때(14절)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임금이요 큰 흉벽을 쌓고 작은 성읍을 치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9:11-12).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큰 임금이 작은 성읍을 함락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솔로몬 왕은 작은 성읍에 살고 있는 인구가 많지 않는 무리들이 이길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바로 ‘가난한 지혜자’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15절을 보십시오: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 솔로몬 왕은 아무리 부하고 큰 왕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지혜자에게는 질 수 있다는 것을 해 아래서 보았습니다. 그 좋은 예가 사무엘하 20장 14-22절에 나옵니다. 옛날 이스라엘 아벨이란 도시가 요압의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였을 때, 그 성읍의 한 지혜로운 여자가 요압에게 지혜롭게 말하며 그 도시를 구원한 일입니다. 결국 지혜자 솔로몬 왕이 이 지혜의 한 예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16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 그것은 바로 지혜가 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 솔로몬 왕은 ‘지혜가 병기보다 낫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전쟁에 있어서 힘이나 병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아무리 힘이 있고 무기가 좋다고 할지라도 지혜가 없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큼 지혜가 힘과 무기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4:7). 그리고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전9:17). 미련한 자들의 지도자의 외치는 소리보다 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말들을 더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지혜가 힘보다 그리고 병기(무기)보다 낫지만 솔로몬 왕은 해 아래서 이해(예상)할 수 없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 이해(예상)할 수 없는 일은 2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오늘 본문 16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솔로몬 왕이 해 아래서 보게 된 것, 그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가난한 지혜자가 이렇게 한 성읍을 구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16절)(위어스비). 여러분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가난한 지혜자는 한 성읍을 건져내는 위대한 일을 하고 나서도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지도 못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배척을 당하는 일도 생기는 것입니까? 저는 그 이유를 잠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14:20),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19:4). 왜 사람들이 자기와 자기가 살고 있는 성읍을 건져내준 가난한 지혜자를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합니까? 그 이유는 그 지혜자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지혜자가 부자였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친구가 되려고 했을 것이며, 그 지혜자를 칭찬하며 그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 지혜자를 멸시하며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지혜가 힘과 무기보다 낫지만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은

오늘 본문 18절 하반 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배케 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전도서 10장 1절을 보면 좀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마치 작은 실수가 지혜의 향기보다 미련한 자의 냄새를 더 나게 하는 것처럼 지혜는 쉽게 전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1)(칼슨). 달리 말하면, 지혜의 큰 가치가 작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하여 파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월볼드). 이 말씀의 좋은 예가 성경 창세기부터 나옵니다. 그 좋은 예란 첫 인간 아담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온 것을 볼 때 한 죄인이 많은 선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롬5:12). 또한 여호수아 시대 때 아간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 전쟁에서 패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수7). 다윗 왕조차도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임했는데(삼하24) 그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나라에 내전을 일으켰습니다(삼하15ff)(위어스비).

 

이렇게 한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 즉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나라뿐만 아니라, 아담과 같은 경우는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온 인류에 죄가 들어오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므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마치 한 가난한 지혜자가 작은 성읍을 큰 임금으로부터 건져낸 것처럼 참 지혜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사단과 그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그 가난한 지혜자를 잊어버렸던 것처럼 사람들은 참 지혜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잠8)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치 사람들이 그 가난한 자의 지혜를 멸시하므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를 멸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죄를 구속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입니다(요 1:12).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8:33-36). 우리는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은총을 얻을 것입니다. 이러한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약1:5)께 기도드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