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입니다.

 

 

 

[전도서 92-6절 말씀 묵상]

 

 

혹시 여러분 ‘파울 신드롬’이란 말 들어 보셨습니까? ‘파울 신드롬’이란 남아공 월드컵을 강타한 신드롬으로서 ‘점쟁이 문어’ 파울이 낳은 신드롬을 가리킵니다. 독일 서부 오버하우젠 해양생물관의 수족관에서 월드컵 경기를 예측한 파울이란 문어의 적중률은 100%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결승전과 독일 관련 7경기 등 총 8경기의 승패를 족집게처럼 맞췄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도 TV와 인터넷으로 이 문어에 대한 기사를 보았지만, 참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어뿐만 아니라, 나중엔 점쟁이 악어와 별의 별 점쟁이라는 동물들이 나오 길래,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배팅 사업체에서는 이 점쟁이 문어 파울로 인하여 돈을 엄청나게 번 사업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페인이 결승전에서 이긴 후, 결승골을 넣은 스페인 선수가 하는 말을 TV에서 보았는데 ‘Long live 파울’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람들이 점쟁이들을 만나서 점(운세, 사주)을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래를 알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전도서 7장 14절이나 8장 7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우리가 미래(‘장래 일’)를 헤아려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장래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미래에 대해 확실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사람의 결국인 ‘죽음이다’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 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다른 것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결국인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2-3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일반입니다’라는 말을 네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이 일반이라고 이렇게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인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은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데 그 일반적인 결국은 바로 죽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2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그는 의인이던 악인이던, 선인이던 죄인이던, 선하고 깨끗한 자이던 깨끗지 않은 자이던, 제사를 드리는 자이던 드리지 아니하는 자이던 등등 모두 다 결국에 가서는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부인할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결국인 죽음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비 그리스도인들이나 다 동의하는 것은 우리 사람의 결국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과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 후의 결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나 비 그리스도인들이나 이 세상(This Age)에서의 결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동의하지만, 죽음 후 오는 세상(The Coming Age)에 대한 결국은 동의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후 오는 세상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살던지 영원히 지옥에서 산다는 오는 세상의 삶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비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오는 세상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전도서 7장2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 땅에서 죽음이란 사실에 유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죽음의 관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삶을 이 땅에서 잘 살아드려야 합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드려야 합니까?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2-6절 말씀 중심으로 한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가득한 죄악들을 회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의인이나 악인이니 결국 이 세상에서는 그 당하는 일에 있어서 별로 차별이 없음으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이유로 하여 그 평생을 범죄의 기회로 삼습니다(박윤선). 예를 들어 악인이 볼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인도 자기들처럼 별 다를 바 없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악인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이 세상에서 죄를 더욱더 범합니다. 그리고 그 악인은 죄를 범하되 더욱더 담대히 죄를 범하는 이유는 그가 행하는 악한 일에 하나님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8:11). 그러므로 악인은 죽음 앞에서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죄를 범하기를 담대히 합니다.

 

여러분은 만일 여러분의 죽음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만일 의사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6개월, 그리고 길어야 1년 밖에 살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전 한 두 가지 반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란 (1)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 것 하려고 시도하던지 아니면 (2)죽음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범한 죄들을 뉘우치며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엔 이 두 가지 반응 중 두 번째 반응보다 첫 번째 반응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결코 죽음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신자들과 또한 회개치 아니하고 비신자들처럼 죽음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 것 하려는 신자들까지 포함하면 첫 번째 반응이 두 번째 반응보다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성경적인 근거는 하나님을 믿었던 구약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징계)가운데 있었던 그들이 얼마나 고집을 피우고 목을 곧게 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했는지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참 더디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생각은 죽음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범한 죄들을 회개하는 사람들보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삶을 우리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면 이것은 마치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3절) 우리는 이렇게 죽음을 맞이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앞서 우리 마음에 가득한 죄악들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은 ‘죽음이란 마치 X-ray와 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치 우리가 병원에 가서 건강 검사를 할 때 X-ray를 찍는 것처럼, 죽음이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는 X-ray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X-ray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듯이, 죽음이란 우리 마음 안에 품고 있는 가득한 죄악들을 들춰내어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란 도구를 사용하셔서라도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안에 가득한 죄악들을 들춰내셔서 회개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 마음 안에 가득 찬 죄악들을 회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시키므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안에 품고 있는 가득한 죄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면서 남은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죄악을 십자가에 부지런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계속 우리의 죄악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이란 사망 선고를 받았을지라도 우리 마음 안에 가득 찬 죄악들을 회개하면서 남은 인생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여러분의 귀에는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 “개”라는 것은 제일 경멸하는 동물 이였습니다(월볼드). 그리고 사자는 우리 알고 있듯이 동물의 왕국에서 왕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솔로몬 왕은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었을 때보다 살아 있는 게 낫다는 말입니다. 왜 죽음보다 생명이 낫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는 올바로 살아볼 기회가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기회가 있고 바로 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유명하고 아무리 부자고 아무리 권력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을지라도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나은 것입니다.

 

과연 오늘도 살아 숨 쉬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죽을 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9장 5절을 보십시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여러분,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죽은 자에게는 사랑함도 없고 미워함도 없고 시기함도 없습니다(6절). 이미 죽었기에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습니다(6절). 한 마디로, 죽은 자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상급을 바라보고 행동할 만한 깨달음도 없습니다(박윤선). 죽은 자는 소망도 없고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됩니다. 그러나 산 자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떠한 소망이 있습니까? 산자는 죽을 줄을 알기 때문에 경성하여 새로운 각오로 살 수가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박윤선).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소망이 있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은 죽을 줄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죽을 줄을 알기에 우리는 경성하여 새로운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죄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놓쳐 너무 늦게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때에 회개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죽고 나서는 회개할 수도 없고, 후회를 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은 다 일반입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드려야 합니까? 우리는 죽을 줄을 알고 우리 마음에 가득한 죄악들을 회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는 X-ray와 같은 죽음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회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마음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산 자들로서 경성하여 새로운 각오로 살 수가 있는 소망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서 우리는 산 자라로서 회개하여 새로운 각오로 주님의 원하시는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장래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기억하십시다.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다’는 말씀을….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회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죽을 때에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길 원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