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아름다움

 

 

 

[전도서 711-14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여러분이 삶 속에 내리는 결정들을 보면 그 결정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 생각은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A와 B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만일 A라는 길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지만, B란 길은 우리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A란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으로 우리가 선택을 할 때에 우리에게 주는 ‘이익’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익이 되는지, 아니면 육체적 생활에만 이익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선택하고자 하는 길이 영적으로 이익이 된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우리의 육체적 생활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일 영적 신앙생활에 유익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우리는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전도서 7장을 묵상하면서 ‘지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4절까지는 ‘지혜의 마음’, 5절에서 7절까지는 ‘지혜의 책망’, 그리고 8-10절에서는 ‘지혜의 섬김’.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1절과 12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11절),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12절). 한 마디로, 그는 지혜가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지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좋다’ 또는 ‘이점’이란 뜻입니다. 즉, 지혜가 아름답다 라는 말씀은 지혜가 우리에게 좋고 이익을 준다는 뜻입니다. 과연 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한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관을 줍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1절에서 솔로몬 왕은 지혜가 유업같이 아름답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유업’이란 것은 영구히 계속되는 소유를 말합니다. 즉, 지혜가 아름다운(우리에게 이익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 등은 영원한 가치가 없지만, 지혜는 유업같이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기에 지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유업같이 영원토록 가치가 있기에 좋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관을 주기에 지혜는 좋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토록 살도록 인도해(도와) 주기에 좋고 유익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고(3:11) 지혜가 바로 우리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만족시켜 주기에 지혜는 좋고, 유익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24:14). 지혜가 있는 자에겐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둘째로,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보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2절을 보십시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여기서 ‘보호’란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그늘’ 또는 ‘대피처’란 뜻입니다(라드매처). 지금 솔로몬 왕은 지혜와 돈이 우리에게 그늘이 또는 대피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햇빛 쨍쨍 찌는 낮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덥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너무 더워서 그늘을 찾지 않겠습니까? 솔로몬 왕은 바로 지혜와 돈이 우리에게 그러한 그늘을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돈이 우리에게 그늘을 준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평온과 안심(pleasant security)을 준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지혜나 돈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지혜와 돈이 여러분에게 보호해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돈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것은 좀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돈이 있으면 좀 안심도 놓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잠13:8).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유괴를 당했는데, 유괴범이 돈을 요구할 때 만일 돈이 있으면 몸값을 지불하고 우리 아이를 건져낼 수 있잖습니까? 근데 만일 우리가 돈이 없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솔로몬 왕은 지혜가 돈 보다 더욱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가 돈보다 더 우리를 보호함에 있어서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생각에도 돈보다 지혜가 우리를 보호함에 있어서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잠언 31장 10-31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10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진주나 돈 같은 물질은 있다가 없어질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이란 것에는 영원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있다가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전7:11). 지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솔로몬 왕은 돈보다 지혜가 더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은 우리 육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영혼은 보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보존해 주기에 지혜가 돈보다 더 유익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13-14). 우리는 지혜를 버리지 말고 지혜를 사랑해야 합니다. 지혜가 우리를 보호하며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잠4:6)

 

마지막 셋째로,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크게 한두 가지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이 고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우리가 형통할 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곤고할 때에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형통할 때에도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곤고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비하여 쉽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형통의 복만 주시지 왜 곤고함을 주시는가?’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4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형통함이나 곤고함은 우리로 하여금 장래 일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함은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만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지혜는 형통할 때에든 곤고할 때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하나님이 주권을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삽니다.

 

(2) 둘째로,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는,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는 형통할 때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며 곤고할 때 우리로 하여금 생각케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4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형통과 곤고를 둘 다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를 병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형통할 때만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곤고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 은혜란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곤고할 때, 이 때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과연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곤고할 때 무엇을 보게 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까? (박윤선)

 

(a) 그것은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지혜는 곤고할 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죄를 보게 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케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사죄의 은총이 큼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곤고할 때 깨달을 수만 있다면 곤고함 자체도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지혜가 깨닫게 해주기에 지혜는 유익합니다.

(b)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보게 해줍니다. 우리가 승승장구할 때에는 주위 사람들을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시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곤고해 지면 그 때서야 주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던 마음도 좀 수그러지게 되므로 그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3)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어느 누구 모든 일이 잘 되고 형통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곤고할 때 우리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도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곤고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d) 그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을 내다보게 해줍니다.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관을 심어주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특히 곤고할 때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더욱더 사모하게 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에게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곤고할 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이 은혜를 누리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아름다움입니다.

 

지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혜는 저와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혜가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유익한 것을 우리를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혜가 유익한 것은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4:7).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약1:5). 그러므로 지혜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지혜의 부족함을 경험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수요기도회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