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의 책망

 

 

[전도서 7장 5-7절 말씀 묵상]

 

 

여러분 혹시 ‘목사병’이란 말 들어 보셨습니까? 한 일이주전 저는 이 말을 어느 목사님에게 처음 들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우리 목사들이 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병은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한 의도는 특히 저 같은 담임 목사를 두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의 의도는 ‘담임 목사의 병은 남을 가르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잘 듣지 않는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을 듣고 솔직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 분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보아도 이 목사 병에 걸려있는 것이 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이 목사 병에 걸리고 싶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제 자신이 걸려 있는 모습을 엿볼 때에 참 마음이 찹찹합니다. 특히 저는 광야의 목회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씀 묵상을 해 온다고 하였는데, 이 병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찹찹합니다. 저는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볼 때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든 생각은 제 자신이 남은 가르치면서 제 자신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하나님의 음성만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의 말도 잘 듣지 못합니다.

 

저는 얼마 전 새벽기도회 때 사무엘하 12장 7절 말씀 중심으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제목 아래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성경 이야기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의 죄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처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기가 잉태한 것을 알고 죄를 덮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결국 자기의 충성 된 군인 우리아까지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기에(27절)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한 성에 있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를 면책하셨습니다(12:1-4). 그 때 다윗은 크게 노하여 나단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5절). 죄를 덮고 덮으려다가 자기 양심마저 덮어버려서 그랬던 것인지 다윗은 자기가 그 “마땅히 죽을 자”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면책하였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7절). 이 얼마나 충격적인 면책입니까? 다윗 자신은 분명히 자기 자신은 그 ‘마땅히 죽을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면책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가 우리가 행한 일들이 죄라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춰내실 때 우리의 양심은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5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이미 전도서 7장 1-4절 중심으로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는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가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에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깊이 생각하기 위해선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야 한다고 우리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전도서 7장 4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헛되고 헛된 연락하는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결국인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고 깊이 생각하는 초상집에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계속 이어서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5-7절에서도 지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에서는 ‘지혜자의 마음’에 대해서 말하였다면,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5-7절에서는 ‘지혜자의 책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지혜자의 책망을 들으십시오’입니다.

 

어느 누가 책망을 듣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의 죄악 된 옛 본능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인지 결코 책망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부모님 시대에 한국식 자녀양육에 대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이란 바로 “마가편”(走馬

加鞭)입니다. 즉, 저는 왜 잘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해야하는지 아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미국식 자녀 양육이 더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미국식 자녀 양육이란 특히 부모가 자녀를 칭찬(격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언젠가 어린이들이 축구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는데, 그 중에 한 장면이 어렴풋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장면이란 어린 아이 하나가 골대 앞에서 공을 찼는데 공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이드라인(sideline)에 서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 같이 보이는 어른이 ‘Good job! Good job!’이라고 소리치면서 박수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마 우리 한국 아버지 같았으면 ‘야, 그것도 못 넣니?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라는 식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제가 저희 집 아들 딜런 축구하는 곳에 몇 번 가보니까, 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요즘은 왠지 엄마들이 더 난리인 것 같습니다. 엄마들이 더 열을 내서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ㅎㅎ 물론 그렇다고 제가 미국식 자녀 양육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 개인적인 생각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저는 자녀 양육에 칭찬(격려)도 필요하고 채찍질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잘 달리는 말에 채찍질도 가해야 하지만 또한 쓰다듬어 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5절을 생각해 보면 지금 솔로몬 왕은 저와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지혜자의 채찍질이 미련한 자의 칭찬(격려)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여기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우매자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지금 그는 우리에게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한 마디로, 우리가 우매자의 노래, 즉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 위로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헛됨을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가시나무가 탈 때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솥의 물을 끓일 수 있는 열은 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가시나무’는 종종 악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삼하23:6; 나1:10) 솔로몬 왕은 육체적 쾌락을 즐기면서 내는 악인의 거짓된 위로의 소리는 그 순간에는 잠깐 위로가 되는 것 같이 보여도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악인의 위로는 헛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우매자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지혜자의 책망입니다.

 

잠언 기자는 잠언 17장 10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미련한 자에게는 아무리 책망을 해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련한 자를 책망하면 그가 여러분을 미워할 것입니다.(잠9:8) 그래서 잠언 기자는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지혜 있는 자는 (사랑으로) 책망하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8절) 또한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면 그 지혜로운 자는 더 지혜로와 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 있는 자를 사랑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9장 9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또한 성경 잠언 25장 1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청종하는 귀’가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참 귀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되 그의 명령의 음성을 듣지만 더불어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책망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딤후3:16). 우리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므로 우리는 죄악의 길을 걷다가도 회개하고 돌이켜 바르게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책망을 받아 회개하므로 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딤후3:16). 그래서 잠언 기자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잠27:5). 우리가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삐뚤어진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 형제에게 사랑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제에게 지혜를 주시면 우리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여 돌이켜 바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위험은 사랑으로 책망을 하는 지혜자 자신이 바른 길을 걸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자가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을 게을리 할 때는 자기 자신도 우매자의 노래를 즐기게 될 위험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 위험을 솔로몬 왕이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이 말씀은 물질을 탐하는 마음은 어두워져서 의외 불의를 분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자미에슨). 결국 우리 자신도 남을 채찍질을 잘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신실하게 하지 않을 때, 뇌물의 유혹으로 인하여 마음의 일어나는 탐심에 자극을 받아 결국 분별력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잠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진리를 들어 보십시오:“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7:23). 그래서 성경 신명기 16장 19-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

 

우리는 지혜자의 책망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청종의 귀’찾아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특히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를 책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책망들을 계속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들춰내는 설교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 디모데후서 4장 3-4절이 생각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은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경 시편 141편 5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 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우리는 지혜자의 사랑의 책망을 ‘머리의 기름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책망이 듣기가 힘들고 괴롭겠지만, 우리가 양심의 찔림 속에서 잠잠히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정하고 자백하며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다면, 우리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의와 불의를 분별하여 의의 길을 걸어가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의와 불의를 분별하여 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저는 신학교 선배 목사님 한 분을 만나서 같이 점심 식사 한 후, 참 진솔한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과 대화를 통하여 귀한 배움을 허락하셨고, 또한 주님 안에서 교제하면서 위로 또한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배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부드럽게 면책해 주셨습니다. 그 선배 목사님의 면책을 받으면서 생각 난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목사님과 헤어진 후, 차타고 교회로 오면서 그 생각난 분에게 전화를 드려서 사과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렇게 사과를 드리고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참 제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과연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들려주시는 사랑의 책망의 말씀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요한계시록 2-3장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들을 보면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만 칭찬을 받고, 나머지 다섯 교회는 칭찬과 더불어 주님께 면책을 받습니다. 한번 그 주님의 면책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1)에베소 교회:“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2)버가모 교회:“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2:14-15). (3)두아다라 교회: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 하는도다”(계2:20-21). (4)사데 교회: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계3:1-3a). (5)라오디게아 교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5-17). 과연 여러분은 이 다섯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저희 교회에 적용되는 책망 말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계2:7, 11, 17, 29; 3:6, 13, 22).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지혜와 청종하는 귀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