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도서 71-4절 말씀 묵상]

 

 

언젠가 한국 YTN 밤 11시 뉴스를 보니까, 흥미로운 뉴스가 있어서 좀 주목해서 본 기억이 납니다. 그 뉴스는 다름 아닌 한국 경기도에 있는 ‘임종체험관’ 이라는 곳에서 실지로 임종을 체험하고자 영종사진도 찍고, 유서도 쓰고 또한 그 유서를 읽고, 자기의 영종사진을 들고 영안실로 가서 유서도 낭독하는 것 이였습니다. 임종 체엄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특히 유서를 읽어 내려갈 때는 대부분 우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들은 유서를 읽어 내려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실지로 관에 당사자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한 사람이 삽으로 흙을 관위에서 천천히 붓는 것 이였습니다. 좀 관하고 간격을 둬서 흙소리가 나도록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흙소리를 산 자가 관속에서 들으면 실지로 죽음을 더욱더 체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그 임종체험을 해 본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 과정 속에서 가족 식구들이 제일 많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 임종체험관 원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인터뷰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너무 ‘웰빙(well-being)’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잘 죽는 준비를 하고자 이러한 임종체험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보고 ‘별거 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아이디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해서라도 우리 사람들이 죽음을 좀 더 피부로 느끼고 또한 죽을 준비를 할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2절 말씀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은 “산 자가 이것에 유심 하리로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2절을 보십시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 기차에서 내려 종착점에 이를 날이 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죽음의 관점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순간순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2절에서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초상집에 가는 것”입니다(2절). 다시 말하면, 장례식에 가는 것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선 장례식에 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제 자신의 죽음을 좀 더 피부로 느끼면서 종종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례식에 느끼는 죽음이란 저로 하여금 어떻게 잘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한 평생을 잘 살았는지는 못 살았는지는 죽은 후에야 평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잘 살았는지 알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이름을 생각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후에 장례식 때에 내 이름 석자를 사람들이 생각할 때 칭찬하는지 안하는지 보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옛 속담에 모든 사람은 세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①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②다른 사람이 나를 부르는 이름, 그리고 ③우리가 얻은 이름. 과연 우리가 얻고 있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우리 이름 석 자인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 잠언 10장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의인의 이름은 죽은 후에 기념할 때에 칭찬이 있다는 말씀 입니다. 그 이름은 축복된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7장 1절의 말씀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세상의 부(wealth)보다 더 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사람의 본능은 초상집보다 잔치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보다 웃음을 더 좋아합니다(3절). 우리 사람들은 육체적 희락에 빠짐을 별세한 자의 유족을 방문함보다 좋아합니다(박윤선). 그러나 육체적 희락(쾌락)은 무익합니다(2:11). 잔칫집에 가서 세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한 것은 초상집에 가서 슬픔을 맛보는 것입니다. 왜 그는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까? 그 이유는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되기 때문입니다(3절). 무슨 말씀입니까? 죽음 문제로 근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그리고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헛된 세상적 쾌락이나 추구하면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7:4).

 

우리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은 육체적 괘락을 즐기는 잔치 집에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례식에 가서 고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죽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언젠가는 주님께서 오라하시면 우리도 가야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란 우리 모든 사람의 결국이기 때문입니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과연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 합니다. 우리 자녀의 마음에, 후손들에 마음에 우리의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 가야 합니다. 최고의 아름다운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므로 우리 후손들에게 또한 앞으로 장차 우리 장례식에 참석할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기억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장례식 때 우리 자녀들이나 후손들이나 심지어 이웃들이 우리 이름 석 자를 생각할 때에 참된 칭찬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자녀들의 마음에 남기고 떠나고 싶어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죽음의 관점으로 살아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