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무거운 것

 

 

 

[전도서 61-6절 말씀 묵상]

 

 

요즘 여러분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저는 어제 화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학원에 갔다가 딜런과 예리는 레슨을 받고 있었을 때, 좀 전화할 일이 있어 학원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난 후 좇아 나온 예은이하고 좀 대화를 나눴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난 저를 보고 예은이가 좀 저기 가서 앉자고 하더니 나무 밑으로 가서 앉더군요.ㅎㅎ 그래서 제가, 앉아 있는 예은이게 앞에 서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How is your life?"(너의 삶은 어떻니?) 그랬더니 예은이의 대답은 "Good”(좋아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예은이에게 뭐가 좋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실토하더군요: Actually I am tire.(사실 저 피곤해요) ㅎㅎㅎ 6살짜리 아이도 인생이 피곤한가 봅니다. ㅎㅎㅎ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심신이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걸머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리 하시다면 오늘 이 시간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시길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전도서 6장 1절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우리는 이미 전도서 5장 13-20절에서 솔로몬 왕이 본 큰 폐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큰 폐단이란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는 것”이였습니다(13절). 더 나아가서, 큰 폐단이란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재물을 지켰는데 결국 재난을 만나서 모든 재물을 잃어버리므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줄 수 없는 것 이였습니다. 결국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15절) 이것도 폐단입니다(16절). 아무리 자기 자신을 해할 정도로 그 모든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합니까? 재난을 만나 다 잃어버리므로 말미암아 결국 자식에게도 물려 줄 재물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참으로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 또 한 가지 폐단을 보았는데 그 폐단은 바로 사람에게 중한 것(6:1), 즉 사람에게 무거운 것(8:6)입니다. 과연 사람에 무거운 그 폐단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6장 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사람에게 무거운 그 폐단이란 하나님께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다 받아 마음의 소원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 모든 것을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누구로 하여금 그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까? 전도서 2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시고 저들로 하여금 재물을 모아 쌓게 하신 후,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 모든 죄인의 재물을 주시사 누리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 즉 ‘고통을 주는 악’입니다(2절).

 

더 나아가서, 솔로몬 왕이 본 폐단은 이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가 다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백 자녀들도 있고 또한 장수하여 오래 살지라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3절). 생각해 보십시오. 재물, 부요, 존귀에다가 자녀 축복 및 장수의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므로 그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면 이 얼마나 고통을 주는 악입니까? 더 나아가서, 이 모든 복들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을 때에 그의 몸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는 악(‘악한 병’)입니까? 그 당시 동양에서는 죽은 시신이 매장이 되지 못하는 것은 제일 큰 수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모든 부요를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을 때에 매장 되지도 못한 사람보다 낙태된 자가 더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3절). 어떻게 낙태된 자가 모든 부요를 누리지 못하며, 죽을 때에도 매장 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낫습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6장 4-5절을 보십시오: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그 당시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은 자녀들이 있다 할지라도 죽을 때 아무 슬퍼하는 자들도 없고, 명예도 없이 죽으면 낙태된 아기보다 더 나쁘게 여겨졌습니다(맥아더). 엄마 뱃속에서 낙태된 생명은 이 세상 햇빛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죽지만, 하나님께 받는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와 자녀의 축복, 장수의 복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을 때에도 아예 매장 되지도 못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이유는 낙태된 자에게는 평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낙태된 아기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재물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 장수의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죽을 때에 매장도 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이유는 그 낙태된 아기는 이 세상에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4:3). 아무리 이 세상에서 오래 산다 할지라도 모든 재물과 부요 등을 누리지 못하고 수고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악을 보면서 살다가 죽을 때에 제대로 매장도 되지 못하는 사람보다 비록 낙태되었지만, 그 낙태된 아기는 이 세상의 근심과 고통 그리고 노고와 괴로움에서 자유를 누리며 평안함을 얻기에 낙태된 아기가 더 나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결론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6). 결국 낙태된 아기나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얻어 천 년의 갑절인 이천년을 산다 할지라도 아무 낙도 누리지 못하고 죽는 자나 마침내 다 한 곳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솔로몬 왕이 보기엔 이것도 폐단이요 사람에게 무거운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교회에서 찬송가 337장(구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을 찬양했을 때 교인 중에 한분이 저에게 그 찬송가를 부르면 좀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저 또한 찬송가 337장(구363장)을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마음이 힘들고 무거울 때 주 예수님 앞에 다 내려놓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찬양하곤 합니다: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2절)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 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3절) 내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대 신 짐을 져주시네

(4절)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그리할 때 저는 저의 무거운 짐을 맡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므로 그 무거운 짐을 가볍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주님 앞에 내려놓고자 하는 저의 무거운 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찬양을 드리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울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목소리가 쳐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3년 전인가 원로 목사님이 계신 중국에 갔었을 때, 새벽 4시 경에 방에서 누워 잠들다가 원로 목사님이 장애인들과 조선족 집사님과 새벽기도회를 하시면서 이 찬송가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때 제 기억으로는 목사님의 찬양 소리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전혀 마음이 무거움을 느낄 수 없는 힘찬 찬양 이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힘찬 찬양이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원로 목사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시는 예수님께 겸손히 응하셔서 모든 짐을 다 주님께 맡겨 버리셨기에 마음이 쉼을 얻으셔서 주어진 주님의 무거운 짐도 가볍게 여기실 수 있으셨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받고 이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폐단을 볼 때에 혹여나 우리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서 나아가 겸손히 내려놓으므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쉼을 얻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쉽고 가볍게 여기는 영성을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심령으로 누리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