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전도서 58-9절 말씀 묵상]

 

 

어제 화요일 오후에 저희 교회 집사님의 매제 되시는 분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로즈힐(Rose Hills) 묘지에 있는 스카이로즈 채플(Skyrose Chapel)라는 곳에 도착하여 저는 먼저 고인이 누워 있는 관으로 가까이 가서 그 분의 손에 제 손을 얹어 보았습니다. 손이 차가왔습니다. 성빈센트 (St. Vincent)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을 때 제가 찾아가서 제 손을 그 형제님의 손에 얹고 기도하고 그랬을 때는 따뜻했는데, 이렇게 잠든 신 후의 손은 참 차가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유가족과 인사를 나는 후 독방에 들어가 예배를 준비하면서 로즈힐 묘지 장례 과정 담당하는 미국 분에게 받은 종이를 읽어 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고인의 생일도 제 품에서 죽은 저희 집 첫째 아기 주영이의 생일과 같은 3월 3일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발인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주영이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파하였습니다. 알게 된 지 3주도 안된 고인 이였지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고인의 유가족과 형제들에게 나아가게 하시 사,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 저는 사랑하는 딸 예리와 예은이의 방에 들어가서 아직 자고 있지 않는 예리에게 장례식에 있었던 일들을 말 해주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에게는 고등학생 딸 둘이 있는데 장례식 때 사랑하는 아빠를 먼저 보낸 그 두 딸이 너무 슬피 울고 있기에 이 아빠가 그 두 자매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리가 하는 말 “그럼 예은이와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 우리도 그럴 거냐”고 묻더군요. 그 의미는 아마 예리는 자기와 자기의 여동생인 예은이가 고등학생이 되면 제가 죽어서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 그래서 저는 예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아빠가 죽어도 너가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기에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하품하는 예리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쩌면 엄마를 꼭 닮아서 아빠가 심각한 얘기만 하면 잠자려고 하느냐 ㅎㅎ.” 그랬더니 자기도 웃더군요.

 

예리하고 대화 한 후 생각해 보니까, 제가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 죽음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면 제 마음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저희 부부와 헤어져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어 부활의 소망과 천국의 소망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죽음에 대한 대화가 저희 가정에서는 그리 놀랄만한 대화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 놀랄 때가 있습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아이들하고 죽음에 대한 대화와 더불어 신앙에 대한 대화를 하다보면 저희 집 막둥이 예은이가 하는 말들이 저를 종종 놀라게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도 제가 아이들과 차를 타고 교회로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제가 저희 교회 히스패닉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고메즈 목사님의 병원에 갔다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저희 집 막둥이 예은이가 “God will save him because he loves God, he is a preacher …”(하나님께서 그분을 건져 주실꺼예요. 그 이유는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설교자 ... 이시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좀 놀래는 이유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말들을 예은이가 하는데 그 말들을 종합해서 제 나름대로 평가해보면 이 아이의 마인드가 영적화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저는 종종 놀라곤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5장 8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놀라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은 우리가 가난한 농민들이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학대 받는 것을 보아도 놀라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5장 8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서 본 것은 빈민이 학대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누가 어떻게 빈민을 학대하는 것을 본 것입니까? 바로 ‘높은 자’, 즉 포학한 관리들이 빈민의 공의를 박멸하므로 빈민을 학대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일들을 보아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러한 죄악 된 일을 보고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결코 솔로몬 왕은 포학한 관리들이 빈민을 학대하는 불법 행위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위어스비). 다만 솔로몬 왕이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그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4:1). 다시 말하면, 그는 해 아래서 권력이 있는 자들이 힘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솔로몬 왕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는 것을 보았기에 악한 권세 있는 자들이 힘없고 연약한 가난한 자들의 공의를 박멸하여 학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3:16).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돈 많고 힘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의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런 일들을 이 세상엔 너무나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의 일곱 번째 사무총장인 아이린 칸(Irene Khan)이란 사람이 쓴 “들리지 않는 진실: 빈곤과 인권”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빈곤으로 인한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분석한 책입니다(인터넷). 저자 아이린 칸은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빈곤한 이유는 소득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차별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이제는 인권이다’라는 제목 아래 400여명의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 등이 특별한 만남을 가졌을 때, 이 자리에선 강연뿐만 아니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들이 보낸 질문과 답변으로 진행된 ‘핫 인터뷰’와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과의 특별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안정 속에서 살고 있고, 소외되고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특히 기본권인 교육권, 건강권, 주거권도 박탈되어 있다. 전 세계 빈민 70%가 여성인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또 빈민 중에서는 소수민, 이주민, 원주민도 많다. 왜냐하면 빈민은 바로 차별 받기 때문에 빈곤하기 때문이고, 다시 빈민은 빈곤하기 때문에 차별받기 때문이다”(인터넷). 이 외에도 우리가 미디아를 통해서 보고 들어서 짐작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아동 노예(Child slavery)’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노동하면서 학대를 받는 것이 특히 빈민 국가에 많다고 합니다. 2005년 국제노동기구 발표는 1,230만 명이라고 합니다. 현대판 노예거래인 국제 인신매매는 매년 80만~90만 명, 100억~320억 달러 규모라고 합니다. 현대 노예제는 전 세계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중동은 가사 노예, 남아시아는 빚을 갚기 위한 담보노동 노예, 우간다나 스리랑카는 아동병사 노예, 선진국은 성노예가 많습니다. 노예 상들은 폭력ㆍ납치ㆍ사기ㆍ협박ㆍ약물투여 등 온갖 수단으로 노예를 생산합니다. 좋은 일자리나 무료 관광을 약속하며, 노예를 사냥하는 인신매매조직이 있는가 하면, 자식을 현대 노예 상에게 파는 가난한 부모가 있다고 합니다. 현대 ‘노예산업’은 교통의 발달, 낮은 형량, 허술한 국경 통제, 정부 고위층과 국제 노예거래 조직 간의 결탁 등으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국제화ㆍ세계화가 노예산업을 돕는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빈민 자들이 포악한 관리들에게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학대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상히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민을 학대하는 포악한 관리들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상관이 있고 그들이 자기들의 죄악을 벌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5장 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솔로몬 왕은 이 세상에서 포악한 관리들이 빈민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여 그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면서 이상히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 포악한 관리들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지혜가 있었기에 자기보다 더 높은 왕중의 왕이신 주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는 지혜가 없는 왕이나 관리 들은 자기들보다 더 높으신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권리)를 남용하여 힘없고 연역한 빈민 자들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혜가 없는 미련한 왕이나 관리들은 그들보다 더 높으신 주님이 계심을 모르고 있기에 빈민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학대하면서도 심판에 두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판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를 솔로몬 왕은 이상이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는 집권자인 왕이나 관리들도 빈민 자들인 농민들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땅의 이익을 받아서 생활하는데(9절) 왜 그들이 농민을 학대하는지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박윤선).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이나 정치인들, 공무원들 모두 다 농민들이나 서민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이익을 누리면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포악한 이들은 농민들이나 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학대하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에베소서 6장 9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왜 직장에서 사장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여 종업원들에게 공갈을 치면서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의 상전이 하늘에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주님이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이 계심을 알아도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직장 삶 속에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종업원들에게 공갈을 치면서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빈민을 학대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죄를 범하는 것이 담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남용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전5:7).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감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학대당하고 있는 그의 백성들을 감찰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빈민들, 가난한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므로 학대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돌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포악한 관리들이 힘없고 돈 없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그들보다 높으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중 죄악 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TV 뉴스를 보아도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소식을 들어도 이젠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에 대한 뉴스를 들어도 ‘참 사람의 잔인성이 어느 정도인가’라는 의문을 들지만, 이젠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5장 8-9절에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포악한 관리들이 빈민의 공의를 박멸하여 학대하는 모습도 그리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이런 저런 우리 사람들의 죄악 된 행동들을 보고 들으면서 저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전 보다 더 이상하게 여기는 게 있습니다. 그때그때 놀라곤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제 삶 속과 제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영의 눈으로 보고, 영의 귀로 들을 때에 참 놀라곤 합니다. 그 한 예로 오늘 새벽기도회 나오려고 차를 타고 시동을 걸고 제 핸드폰을 켰더니, 음성 메시지가 와 있기에 들어보았습니다. 그 음성 메시지를 보낸 분은 저와 저희 교회를 사랑하는 김 모 전도사님의 음성 메시지였습니다. 그 메시지 내용은 ‘지금에서야 좋은 반주자 분을 찾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음성 메시지 내용을 듣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너무나 정확하게, 그 분의 시간에 우리 교회에 필요한 동역 자를 보내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월요일 점심쯤에 어느 한 집사님이 전화 와서 교회 반주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그 집사님과 그의 남편 형제를 생각할 때 한 달 동안 저희 교회 와서 도와주기로 약속했는데 이번 주일이 한 달이 되는 주일이기에 우리 교회 걱정하지 말고 본 교회로 돌아가려면 가라고 권면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근데 그 집사님은 반주자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희 교회 반주 돕는 것을 중단하고 섬기는 교회로 갈 수가 없다고 말하더군요. 참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하실 때 저는 종종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제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 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최고로 놀랄 일이 곧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우리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날 그 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목격할 뿐 아니라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놀랄 것이며, 그의 재림으로 인한 우리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날을 기도하며,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가운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죄악 된 일들로 인하여 더 이상 여기지 않지만 하나님의 행하시는 역사를 경험하므로 말미암아 놀람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이상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더욱더 가득 차는 가운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