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

 

 

 

[전도서 413-16절 말씀 묵상]

 

 

저는 지난 주 토요 새벽기도회 때 출애굽기 36장 1-7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한 3가지 기도 제목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세 가지 기도 제목이란 (1)첫째로,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옵소서” (2)둘째로, “하나님, 우리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3)셋째로, “하나님, 우리의 마음에 탐심을 제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첫 번째 기도 제목인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What?)와 어떻게(How?)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지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구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심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지혜와 총명을 주신 일꾼들을 부르사,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아가심에 있어서 일꾼들을 세우시사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련하게 교회를 섬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지혜롭게 섬겨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3-16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13절과 14절에 나오는 “가난하여도”(13절)와 “가난한 자”라는 단어들을 보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외로움)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가난과 가난한 자는 영적인 면을 이야기하기보다 실제적으로 가난함과 가난한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적용해 볼 때 좀 영적화 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적 가난과 심령에 가난함의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연관성의 근거를 마태복음 5장 3절이라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물론 저는 실제적으로 부자이면서도 심령이 가난한 참 경건한 성도님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가난하면서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성도님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으로 가난해야 하던지 또한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던 부자이던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은 항상 가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지혜’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3-16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지혜’란 제목 아래 과연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는 무엇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는 경고를 받을 줄 압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3절을 보십시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서 솔로몬 왕이 한 3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소년’과 ‘왕’, 지혜로움과 둔함, 그리고 가난함과 부함입니다. 이 비교를 하나로 묶어서 말한다면, 그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과 부하지만 늙고 둔한 왕에 대해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비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난한과 부함도 아니요 젊고 늙음도 아니고, 소년이든 왕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는 ‘간함’, 즉 ‘충고(advice)’를 받을 줄 압니다. 그러나 둔한 자, 미련한 자는 충고를 받지 않습니다. 늙고 둔한 왕은 ‘간함’, ‘충고’를 받을 줄 모릅니다(13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질문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질문이란 “과연 충고를 듣지 않는 늙고 둔한 왕이 젊었을 때도 그랬을까?”입니다. 어쩌면 이 늙고 둔한 왕은 젊었을 때는 (어쩌면 왕이 되기 전에는) 주위 사람들의 사랑의 권면이나 충고, 또는 경고를 겸손히 듣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늙어서 둔하게 만들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혹시 왕이 되어 그의 부함이나 그의 권력이 그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며 둔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왕위에 늙도록 앉아서 교만하여졌음으로 옳은 충고를 받지 않는 자가 불행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박윤선). 교만한 자는 결코 옳은(바른)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그는 충고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옳은 충고를 듣습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12:15). 솔로몬이 왕이 될 즘에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 왕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때, 선악을 분별할 수 있길 원했기 때문입니다.(왕상 3:9)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지혜로운’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인 ‘쉐메아’는 ‘듣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솔로몬의 신앙자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종은 듣겠나이다. 말씀만 하옵소서!’ 라는 복종의 자세라는 것입니다.(인터넷) 우리도 솔로몬 왕처럼 복종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잠언 19장 20절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를 얻어 옳은 충고를 듣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는 주님께서 높이실 줄을 압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4절을 보십시오: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솔로몬 왕은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이 늙고 둔하여 경고를 들을 줄 모르는 왕보다 왜 나은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지혜로운 소년은 그 나라에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된 적이 있었지만, 결국 나중엔 감옥에서 구원 받아서 그 나라에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지혜로운 가난한 소년이 살았던 나라에 늙고 둔한 경고를 듣지 않는 왕 외에 또 다른 왕이 있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늙고 둔한 왕이 권세에서 물러나서 그 다음에 후임자로 이 지혜로운 가난한 소년이 왕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성경 인물 중 누가 생각나십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물론 요셉은 애굽의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3-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된 “지혜로운 젊은이”를 생각할 때 감옥에 있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생각납니다. 이 요셉을 생각할 때 비록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려서 가난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더욱더 사랑하시사 함께하셔서 형통케 하시되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술관원(과 떡 관원)의 꿈을 해석하여 줘서 결국 나중에 가서는 애굽 왕 바로의 꿈까지 해석하여 감옥에서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또는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 진리에 대하여 여기저기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사도 베드로가 “젊은 자들”에게 권면한 말인 성경 베드로전서 5장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또한 사도 야고보가 야고보서 4장 10절에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이렇게 성경은 주님 앞에서 우리가 낮출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그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케 하셨”습니다(9-11절).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낮아지십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십시다. 그리할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셋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지혜는 세상의 영예가 헛됨을 압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5-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저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 왕이 해 아래서 본 것은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13절) 비록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을 때(14절) 저의 치리를 받는 무수한 백성들이 처음에는 그 왕을 좇고(15절) 그 젊은 왕을 기뻐하였을지라도 결국 나중에 그 젊은 왕도 나이가 늙었을 때 “후에 오는 자들” 곧 그 왕이 젊었을 때 함께 하였던 그 무수한 백성들의 후세대 사람들이 그 늙은 왕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절)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볼 때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영예는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15-16절).

 

저는 가끔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통령 선거를 할 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저렇게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대통령이 되면 한 나라를 치리함에 있어서 참 힘들 텐데 왜 대통령이 되려고 저렇게 애써서 선거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대통령이 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력을 잡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까? 어떤 나라의 대통령들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력을 잡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권력 외에도 세상의 영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세상의 영예가 뭐 길래?” 언제가 영화를 통하여 느낀 점은 해병대 같은 직업 군인들 중에는 영예를 위해 살고 영예를 위해 죽은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세상의 영예가 하나님 보시기에 또는 영원한 관점으로 볼 때에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과연 영원한 관점으로 생각할 때 세상의 영예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솔로몬 왕이 오늘 본문 전도서 4장15-16절에서 말하고 있는 왕은 세상의 온갖 영예를 누렸다 할지라도 아마도 솔로몬 왕 자신처럼 세상의 영예를 누렸을까 생각해 볼 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신구약을 통틀어 솔로몬 왕만큼 세상의 영예를 누린 왕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의 영예가 헛되다고 말하면서 해 아래서 세상의 영예를 좇는 것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영예를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진리를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영예를 좇는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의 영예를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익한 세상의 영예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참 유익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충고를 듣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저와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충고뿐만 아니라, 주위에 사람들의 충고도 잘 듣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되 때가 되면 주님께서 분명히 높이실 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세상의 헛된 영예를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참 심령이 가난한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듣는 귀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