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전도서 47-12절 말씀 묵상]

 

 

이동원 목사님의 느헤미야 설교 중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 보면 서론 부분에 망해가던 미국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를 재건하여 경영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경영의 비밀을 물었을 때, 그가 말한 유명한 3-P를 소개 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 3-P 원리란 principle(원리), practice(실천), 그리고 persistence(집중)입니다. 한 마디로,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되 일관성 있게 집중적으로 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은 최근에 건강한 리더십의 이상으로 제시된 '원리 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라는 지도자가 이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면서 바로 이런 원리 중심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중시한 리더십의 원리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질문하면서 한 3 가지로 요약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제일 첫 번째 원리는 바로 ‘협동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3장에 나오는 75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는데, 그 75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나란히 서서 협동하여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의 리더십에서 결격사항 제 1호가 바로 이런 협동의 정신이라고 지적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비협동적입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비협동적인 사람들을 ‘독 속의 게’에 비유합니다. 독 속의 게 하나하나는 모두 독 밖으로 기어 나올 충분한 역량이 있는데 기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게 하나가 기어 나오려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입니다. 게들의 생존방식은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이러한 지나친 극단적인 이기주의, 이것이 요즘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7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헛된 것이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이 말씀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자기의 탐심만 채우기 위하여 수고함이 헛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솔로몬 왕이 해 아래서 본 것은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면서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4절). 이러한 시기는 결국 시기하는 사람의 마음에 탐심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서 시기하는 그 사람은 자신의 탐심을 채우고자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는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절). 이 말씀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는 심지어 자기 아들이나 형제도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결국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부를 얻고자 이 세상에서 모든 수고를 마지않고,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한 마디로,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삶은 헛되며 무익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수고가 헛되고 무익하다는 말입니다. 솔로몬 왕은 아무리 수고를 해도 자기 자신의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면서 한 인생을 보낸 후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참 내가 헛되게 살았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모습을 극단적인 개인주의 자들에게서 본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 또한 솔로몬 왕처럼 이 세상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의 헛되고 무익한 수고(노고)를 보고 있습니까? 자기 자식들이나 형제들도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평생 열심히 일을 해서 부를 축적은 하였지만,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고 기쁨이 없는 참으로 불쌍한 인생들을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말로는 자식과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평생 일을 했다고 말하지만 자식도 형제도 돌보지 않았으므로 관계가 절단되고 그 결과 자기 스스로는 자식들과 가정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지만 가정식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은 극심한 외로움 가운데서 스스로 ‘내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평생 고생해서 살만큼 되었을 때 병을 걸려 죽든지 사고로 죽든지 하면서 축적한 부도 누려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자식들과 형제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외롭게 죽은 사람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8절)입니다.

 

솔로몬 왕은 헛되지 않고 무익하지 않은, 즉 유익한 것을 보았습니다(9-12절). 그 유익한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솔로몬 왕이 본 유익한 것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함께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9절). 여기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말씀은 숫자를 얘기하기보다 우리가 합심 협력 할 때 유익하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과연 무엇이 유익합니까? 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습니까? 솔로몬 왕은 한 3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한 사람이 넘어지면 또 다른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0절을 보십시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홀로 있다가 넘어지면 누가 일으켜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걷다가 한 사람이 넘어지면 또 다른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솔로몬 왕은 여기서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나은 이유는 서로 붙들어 주고 서로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힘들 때 서로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힘들 때 한 사람이라도 여러분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교회란 공동체는 힘들 때 서로 도와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넘어지면 서로 붙들어 주고 힘을 주고 도와주는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서로 위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1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솔로몬 왕은 이 세상에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의 눈물을 보았지만 동시에 본 것은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음을 보았습니다.(1절)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줄 사람도 필요 하겠지만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위로자가 또한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외로울 때 함께 있어주며, 마음이 아파 울 때에 함께 울어주는 그러한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위로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므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합심하면 견고히 서서 능히 모든 역경을 이겨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12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흥미롭지 않습니까?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8절에서 한 사람, 그리고 9절에서 11절까지는 두 사람, 그러다가 12절에 와서는 세 사람을 의미하는 “삼겹 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겹 줄”은 무었을 의미합니까? 한 줄이면 쉽게 끊어지고, 두 줄이면 좀 더 들 쉽게 끊어지겠지만, 줄 세 개가 짜여있다면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위어스비). 혹시 여러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를 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금문교 다리를 지지해 주고 있는 케이블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십니까? 그 케이블은 수많은 철사들이 모여 하나의 굵은 케이블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케이블의 굵기는 92.4cm로 어지간한 고목나무보다 더 굵어 어른이 한 아름에 안기가 힘들 정도라고 합니다. 케이블 하나를 만들기 위해 27,572개의 가는 철사가 합쳐졌고 연필 두께 정도의 철사들을 옮겨온 다음, 한데 묶어 61개의 봉을 만들었고, 이 봉을 압축한 다음 한데 묶어 3피트 굵기의 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느다란 철사로 케이블을 감아 매끄럽게 끝마무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2만9천 km에 이르는 강철선이 엮어져 굵은 케이블이 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금문교 케이블이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세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하면 견고히 서서 능히 함께 모든 역경을 이겨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도와주며 위로할 뿐만 아니라 서로 보호해주며 모든 역경을 함께 이겨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 안에서의 사랑의 교제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공동체를 꿈꾸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점점 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딤후3:2). 이러한 개인주의 성향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자기의 탐심만 채우기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전4:8). 평생 열심히 일을 하며 수고하여 부를 어느 정도 축적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부를 쌓아가지만 결국은 가족 식구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은 사람들을 우리가 볼 때에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가?” 자신의 심령으로 낙도 누리지 못하고 평생 고생하여 일을 하다가 외롭게 죽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솔로몬 왕처럼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기주의 현상과 더불어 또 우리가 요즘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기적 가족주의’라 생각합니다. 즉, 사람들이 점점 자기 가족 밖에 모릅니다. 다른 가족들은 관심도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가정이 붕괴되어가는 이 시대에 극단적인 역반응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이 붕괴 되어가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자기 가족만을 지키고자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이기적 가족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보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교회 안에서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기도하며 신앙 생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입니까? 오늘 솔로몬 왕은 저와 여러분에게 본문을 통하여 바람직한 신앙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람직한 신앙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서로 협력하는 것, 협동정신입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 협동의 원리가 유익합니다. 그 이유는 힘들 때 서로 도와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위로하며 합심하여 견고히 서서 능히 모든 역경을 함께 이겨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공동체는 이 협동의 원리에 충실하여서 서로 돕고 서로 위로하면서 함께 승리해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협동 원리를 일관성 있게 실천으로 옮기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