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함

 

 

 

[전도서 44-6절 말씀 묵상]

 

 

요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평온함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평온함을 구하는 기도문'(The Serenity Prayer)을 읽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영문으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God, grant us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we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we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Amen)(인터넷).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기도처럼 하나님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구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 기도를 한 번도 하나님께 드려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제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달라고는 기도해 보았지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가운데서 제 스스로 바꾸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제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꾸려고 노력한답시고 좀 발버둥 칠 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평온함이 없이 갈등과 고민과 자책감 속에서 허덕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 주셔서 말씀에 비춰진 제 자신의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며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기다리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 평온함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고 계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쓴 “평온함의 십계명”이 있어 나눕니다(인터넷). 아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평온함의 십계명을 만들어서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내 삶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나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을 것이며 남을 바로잡아 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내 자신만을 비판하고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행복해 할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사정들을 나의 소망에 적응시키려고 하지 않고 내가 그것에 적응할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10분 동안을 독서에 바칠 것이다. 육신의 삶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의 삶에도 좋은 독서가 필요하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착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내 욕망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 어떤 일을 할 것이다. 내 마음에 유감스런 일이 있다고 느껴지면, 그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할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설령 그것이 내 뜻과는 정반대가 되더라도 하느님의 섭리가 이 세상에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을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그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 오늘만이라도 나는 정확한 계획표를 작성할 것이다. 설사 그 계획을 정확히 실행할 수 없을지라도 작성할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악, 즉 '조급히 서두는 것' 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것' 을 경계할 것이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4-6절에서 전도자 솔로몬 왕은 우리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3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우리는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우리가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전도서 4장 1-3절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서 권세 잡은 자들이 힘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았다(목격했다)는 사실을 생각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은 학대 받는 자들과 그들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4절에서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면서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서 본 것은 사람들이 시기하면서 서로 경쟁심을 가지고 모든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기’란 무엇입니까? 시기란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일, 또는 그런 마음’을 가리키며,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는 일, 또는 그런 마음도 시기의 습관’에서 형성됩니다. ‘시(猜)’자는 ‘개 견’ 변에 ‘푸를 청’자가 합성되어 ‘개가 푸른 상태’, 즉 개가 다른 개가 먹이를 소유한데 대하여 으르렁거리며 파랗게 되어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기(忌)’자는 ‘기심(己心)’의 줄임자로서 자기중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기적 감정으로서의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인터넷). 라틴어 Indivia란 ‘악하게 위로 쳐다본다’는 의미로서 ‘악한 눈’을 만드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즉, 시기는 타인의 소유, 특별히 자기 것 보다 더 훌륭한 소유에 대한 슬픔과 불쾌의 감정으로서, 그로부터 그것을 탈취하려는 욕망을 수반합니다(인터넷). 성경 사무엘상 18장 9절을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을 주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울 왕은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다윗에게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라고 하였을 때 사울 왕은 그 날 후로 질투의 눈(a jealous eye)으로 다윗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 창세기를 읽으면서 성경의 인물들이 시기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0장 1절을 보면 아기를 낳지 못했던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기를 낳는 자기의 언니 레아를 시기(투기)하여 남편이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바가지를 긁는 모습을 봅니다. 또한 창세기 37장 11절을 보면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을 받는 요셉을 형들이 시기하는 모습을 봅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시기가운데서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시기가 무섭습니까? 시편 기자 아삽도 악인의 형통을 시기(질시)하였었습니다(시73). 의인은 고생하고 고난을 당하는데 악인은 잘 먹고 잘 사며, 형통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시기할 수 있습니다. 부러움이 슬픔과 불쾌감으로 변질되고 더 나아가서는 악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갖고 싶은(혹은 탈취하고 싶은) 욕망까지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시기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 마음의 화평, 마음의 평온함은 우리 육신에게 생명을 주는데 비해 시기는 우리 깊은 뼈 속까지 썩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뼈에 좋은 것은 선한 말, 마음의 즐거움, 마음의 화평입니다. 뼈에 나쁜 것은 시기, 근심, 분노입니다. 시기는 뼈를 썩게 하고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고 분노는 뼈를 죽게 합니다”(인터넷).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제가 어느 신학교 총장 임직식에 참석했을 때, 한 어르신 목사님이 자기 교회 부교역자들 사이에 선한 경쟁을 시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좀 의아해 하였습니다. 어떻게 담임 목사님이 부목사님들을 서로 경쟁을 시키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면서 과연 선한 경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경쟁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선한 경쟁이라는 것을 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경쟁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4절에서 솔로몬 왕의 말에 근거해서 사람들 사이에 경쟁심을 갖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경쟁심이란 결국 마음에 평온함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쟁의식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화평보다 시기, 근심, 분노로 채워질 가망이 많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4절에서 이웃과 경쟁하는 의미에서 가지는 욕심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4)(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평온함을 빼앗아 가는 경쟁의식, 시기를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웃과 경쟁하는 의식을 가지고 욕심의 헛된 수고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마음의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 시기를 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5절을 보십시오:“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솔로몬 왕은 우매자, 즉 미련한 자는 ‘손을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손을 거둔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미련한 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21:25).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자는 우매자, 즉 미련한 자입니다(전4:5).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공동체 안에는 일하기 싫어하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규모 없이 행하여 일만 만들었습니다(11절). 왜 이들은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일만 만들었습니까? 다시 말하면, 왜 이들은 미련하게 게을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지 않고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잘못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중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삐뚤어진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1874년도에 있을 것이라는 여호와의 증인 창시자 찰스 테이즈 럿셀(Charles Taze Russell)의 예언을 듣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라 모든 것을 중단한 것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 잘못된 예수님의 재림관을 가지고 손을 거두로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종말론 외에 어떤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까?

 

여러분, 게으른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게으른 자는 핑계를 잘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26장 13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길과 거리는 사람들이 일하는 일터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사자가 있다면 그런 곳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겁을 먹고 자신이 없을 때 핑계를 대는 구실입니다’(인터넷). 게으른 자의 또 다른 특징은 잠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26장 14절을 보십시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이것은 게으른 자는 잠자리를 맴돈다는 말입니다. 즉,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뒹굴면서 잠자기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 성경 구절들 외에서 성경 잠언은 게으름에 대해서 여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6:9-11),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19:15).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5절에서 솔로몬 왕은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미련한 자는 게을러서 아무런 수입을 얻지 못하고 다만 멸망을 자취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그는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0:18). 이 말씀은 게으른 통치자들의 방탕한 생활은 나라를 망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됩니다(잠10:4). 다시 말하면,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함에 있다는 말입니다(12:27). 성경은 부지런한 자에 대해서는 부자가 될 뿐만 아니라(10:4), 사람을 다스리게 되며(12:24), 마음의 풍족함을 얻고(13:4),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게 된다(히6: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마음에는 평온함이 있습니다.(인터넷) 그러나 게으른 자의 마음에는 근심과 걱정과 핑계와 원망, 불평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하나님으로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두 손에 가득하고 헛된 일에 수고하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해도 마음에 평온함을 갖고 있는 게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유의 많음과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함이 있느냐 없느냐고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주로 우리 사람들은 물질이나 소유의 풍부함을 원하여 추구하다 보면, 이웃과 경쟁하면서 시기하는 가운데 욕심을 가지고 수고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마음의 평온함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위험은 마음의 평온함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물질이나 소유의 풍부함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족감을 계속 누리고자 더욱더 욕심을 부리게 되고, 더욱더 욕심을 부리게 되면 그 만큼 마음의 평온함보다 스트레스,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까지 이르게 되면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마13:22)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시37:16). 또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무슨 말씀입니까? 소득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 그리고 의와 불의,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이라고 항상 소유가 적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의인인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 소유가 많았습니다. 물론 악인이라고 항상 소유가 풍부하다는 말 또한 아닙니다. 악인도 소유가 적은 사람들이 이 세상엔 수 없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인의 마음은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반면에 악인의 마음은 주님 외에 소유의 풍부함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온함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빌립보서 4장 11-13절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궁핍함과 풍부함에 다 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궁핍함과 풍부함 속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 비결이란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평강의 왕이 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추억이란 수년전에 호스피스에 마크 형제님을 찾아갔었을 때, 그 형제님에게 “My peace I give unto you”(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라는 복음성가를 울면서 불렀던 기억입니다. 이 복음 성가 가사는 이렇습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저는 이 노래를 고등학교 때 꿈속에서 찬양을 드렸을 때 누렸던 평안이 좀 생각납니다. 비록 우리가 평안 없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평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세상일이 줄 수 없는 오직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온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시기와 게으름과 물질의 풍부함으로 만족하는 경향을 경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