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 (3)

 

 

[전도서 314-22절 말씀 묵상]

 

 

지난주일 지도자 모임 때 각자 돌아가면서 금년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짧게나마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금년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크리스마스카드와 함께 편지를 써서 여기 저기 보냈습니다. 그 편지 내용 중 이런 문장을 있습니다: “이렇게 금년 한 해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웃을 수 있었습니다. 시무룩할 때도 있었고, 울 때도 있었지만, 마음 아파 힘들어 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하셨고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금년 한 해도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우리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이 주 동안 수요기도회 때 전도서 3장 1-14절 말씀 중심으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였습니다. 한 2 가지로 우리는 묵상했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적을 이루시므로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므로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오늘은 본문 전도서 3장 14-22절 말씀 중심으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3)’란 제목 아래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 어떻게 아름답게 하시는지 묵상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고자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불의의 심판이 세상 법정에서 행해질 때에도 그의 목적()을 이뤄 나아가시므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지혜자 솔로몬 왕이 해 아래인 이 세상에서 목격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법정에서 재판장들이 의인과 악인을 공평히 재판하여 구별하지 않는 일입니다(박윤선). 솔로몬 왕 시대 때나 지금이나 세상 법정에 얼마나 많은 불의가 행해지고 있습니까? 공의를 행해야 할 재판장들이 뇌물을 받고 불공평이 재판하는 이러한 세상 법정, 돈만 있으면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는 변호사들을 사서 살인 같은 죄를 범하고도 무죄 판결을 받는 이러한 세상 법정에 우리는 공의가 아닌 불의, 진실이 아닌 거짓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결과 우리 성도들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었던 롯이 그랬습니다. 의로운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는 무법한 자들, 즉 불의한 자들 중에 거하면서 날마다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습니다(벧후2:6-8). 그러나 솔로몬 왕은 이러한 불의의 이들이 특히 불의한 심판이 행해지는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므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전3:14-22).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시는 것일까요? 한 두 가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이 세상의 불의의 심판이 행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세에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솔로몬 왕이 마음으로 믿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심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현세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공의로운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그래서 그는 전도서 12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 하시리라.” 결국 하나님께서는 내세에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선을 행한 것이던 악을 행한 것이던)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물론 불신자와 신자의 심판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불신자의 심판은 불못(일반적으로 지옥으로도 불리는 영원한 징벌의 장소)에 던지어지기 직전에 행해질 마지막 심판을 받지만 우리 신자들은 우리가 한 일에 때라 보상 받을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11:9) 그는 청년들에게 젊었을 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원하는 대로 좇아 행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는 경고하고 있습니까? 솔로몬 왕은 젊은이들에게 사후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최후의 심판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저와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솔로몬 왕처럼 우리의 심중에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3:17).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습니다(1절). 그 기한(때) 중 분명히 심판의 때도 있습니다(17절). 그러한 심판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므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법정에서 행해지는 불의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불의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바라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불의의 심판이 행해지는 때에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솔로몬 왕은 이 세상에서 불의한 재판(16절) 때문에 우리 신자들이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의 악인들의 불의한 재판을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을 시험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시련에 의하여 겸손하게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시련에 의하여 겸손케 하시는 것입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그 시련에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곧, 시련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학대를 받아 죽는 육신의 죽음에 있어서는 짐승과 같음을 깨닫고 육신 중심으로 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시련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시사 육신 중심으로 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죽기 때문에 육신 중심으로 사는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TV이나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지른 살인자를 보면서 ‘짐승 보다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쌍둥이를 임신한 한국 여성을 겁탈하고 살인한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겁탈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60대 된 사람이 말렸는데도 안 되니까, 911을 불렀지만 결국 그 여성은 아이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시편 기자 아삽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내가 …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시73:22) 아삽이 누군가를 잔인하게 살인하였습니까?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그가 범한 죄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한 것이 과연 짐승 같은 행동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9-20절과 연관해서 얻어야 할 교훈은 육신 중심적인 삶은 짐승과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가리켜 솔로몬 왕은 헛된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전도서 3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결코 육신의 일을 추구하면서 짐승과 같이 헛된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솔로몬 왕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22절).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기 일, 영원한 일, 주님의 일에 즐거워하면서 충성하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분복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2절 하반 절에 말씀하고 있듯이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22절)(박윤선). 한번 사는 인생, 우리는 육신의 일을 하면서 헛되게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적어도 사람의 영혼의 장래와 짐승과 다를진대(21절) 어떻게 우리가 육신의 일을 하면서 짐승처럼 살다가 죽겠습니까?

 

어제 새벽기도회 때 데살로니가후서 3장 3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재림 전에 사탄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믿는 자라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기에 우리는 굳게 서 있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았습니다. 불법한 자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거짓의 것을 믿는 자들이 복음에 불순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심판이 세상 법정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믿는 성도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하십니까? 우리에게 내세에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더욱더 믿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게 하시며 또한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일이 아닌 영의 일,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참된 사람의 분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이렇게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더욱더 아름답게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금년에도 때에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까지 오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새해에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도하며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