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 (1)

 

 

[전도서 31-14절 말씀 묵상]

 

 

여러분들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주 토요일 저녁, 저희 교회 1구역 예배 때 다른 교회 다니시는 집사님도 참석하였었는데, 그 분이 예배 후 저녁 식사하면서 저에게 새로 나온 영화 ‘2012’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습니다. 한 2시간 넘은 영화라고 말씀하시면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액션이 참 많이 나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2012’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좀 인터넷을 뒤져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재난의 총집합 영화로서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내용입니다. 고대 마야 문명에서부터 끊임없이 회자되어 온 인류 멸망에 대한 이야기 중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는 아마 마야인이 만든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 밖에 만들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가 봅니다. 또한 저명한 과학자들도 오랜 연구 끝에 실제로 멸망의 시기가 2012년이라고 합니다. 1940년대 이후, 그중에서도 특히 2003년 이후로 빙하기 말기에 급속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내린 지 1만 1000년 만에 태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행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양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그동안 관측한 결과를 토대로 2012년이면 태양의 활동이 또다시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고 합니다. 태양에 폭풍이 일면 지구에도 폭풍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전 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화산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 재해들이 발생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이 도래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제가 지난 주 토요일 이 영화에 대해서 듣고 나서 그 다음 날 주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저희 교회 90이 넘으신 한 집사님하고 이 영화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이유는 집사님께서는 전에 일본 신문에서는 2050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기사를 보시고 저에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집사님에게 농담으로 2050년이면 ‘집사님은 살아계시지 않으실 것이니까 걱정이 없으시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드렸었는데 이젠 지구 멸망이 2050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고 해서 그저 농담 삼아 집사님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러한 영화나 신문 기사들, 즉 마지막 때에 대한 이 세상 얘기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도 이 세상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 세상의 끝이 오는 것은 알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누가복음 12장 56-5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사람들이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우리가 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분변치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2012’라는 영화처럼 지구 멸망이란 재난 영화들과 종말에 대한 책들이 계속 나오곤 있지만 지금 이 시대가 마지막 때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1절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 (1)’이란 제목 아래 본문 전도서 3장 1-14절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어떻게 아름답게 하시는지 우선 한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적을 이루시므로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여기서 솔로몬 왕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또한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삶 가운데 역사(일)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아가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위어스비). 이렇게 말하면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2절부터 8절까지 여러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때를 한 5개로 나눠 보았습니다:

 

(1) 첫째로,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2절을 보십시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이미 솔로몬 왕은 “지혜자의 죽음이나 우매자의 죽음이 일반”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2:16).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 3장 2절에서 우리는 이 태어날 때도 있지만 분명히 죽을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남과 죽음이란 나무로 말한다면,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사람은 태어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사람은 죽기도 합니다.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나무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오직 주님의 뜻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오직 주님의 영광이 들어나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인생의 삶과 죽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뤄 나아가시므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2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기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저의 태어남보다 저의 죽음을 아름답게 해주세요.”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 저로 하여금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시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나무로 말한다면 잘 심겨져서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열매를 맺어 드리다가 뽑히길 하나님께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저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그 이유는 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뤄질 때 저의 삶과 죽음은 아름다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징계 받을 때도 있고 회복 받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3절, 5-6절, 7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있고 회복 하실 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사람을 죽일 때나, 건물을 헐 때나, 돌을 버릴 때나, 안는 일을 멀리할 때, 찢을 때는 다 하나님의 징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치료할 때나 건물을 세울 때나, 돌을 거둘 때나 안을 때, 찾을 때, 지킬 때, 꿰맬 때는 다 회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 솔로몬 왕은 징계 받을 때와 회복 받을 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여도 연약하여 옛 습관 속에 살므로 하나님께 범죄 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징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 할 때 징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에는 중요한 것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 자복 및 회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셨다가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징계하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사랑하시니까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는 우리를 때리시고 또한 사랑하시니까 우리를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와 회복 사이에는 우리의 죄 자복 및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 자백과 회개가 없으면 회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징계와 회복 가운데 그의 사랑과 우리의 죄 자복 및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시사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3) 셋째로,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4절을 보십시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이 세상에는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 된 일, 죽을 일이 쌓인 세상입니다. 시편 기자 모세가 말했듯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시90:10).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모두 다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슬퍼 울 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와 불신자의 슬픔을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 다 똑같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같은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흘려야 하는 눈물은 바로 회개의 눈물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고난과 고통 중에서 울며 슬퍼해야 합니다. 이러한 눈물과 슬픔은 참 귀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전7:3). 우리 얼굴에는 근심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얼굴에 근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좋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 마음이 좋게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경건한 근심함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므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 경건한 근심이야 말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때문에 우리 얼굴에 근심함은 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픔 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허락하신 슬픔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할 수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울 때나 웃을 때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4) 넷째로,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7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이미 솔로몬 왕은 전도서 5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급한 마음으로 그리고 함부로 입을 열어 말을 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길게 하지 말고 짧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중언부언 하면서 했던 말 또 하면서 기도를 길게 하는 것보다 마음을 쏟아 진실 되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합당한 기도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길게 하고 짧게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잠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많이 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입을 열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잠잠케 하시며 또한 말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입을 열어 우리의 죄를 자백케 하시므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5) 마지막 다섯째로,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3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악을 미워할 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왠지 요즘 우리 교회를 보면 사랑해야 할 이웃은 미워하고, 미워해야 할 죄악은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아름답기보다 추합니다. 우리는 사랑할 대상과 미워할 대상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케 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악을 미워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사랑의 대상과 미움의 대상을 혼동시키는 사단의 유혹에 대항하여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 전쟁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므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평화 속에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며 또한 미움과 전쟁 속에서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 속에서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므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울 때나 웃을 때나, 징계 받을 때나 회복 받을 때나, 잠잠할 때나 말할 때나, 사랑할 때나 미워할 때에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뤄 나아가시므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이 모든 때 가운데 역사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그리할 때 비록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 없어 보일지라도(사53:2)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를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1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