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

 

 

[전도서 212-26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면 어느 성경구절이 생각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전도서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한 전도서의 관점에서 볼 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헛되다는 사실(1:1-11), 이 세상의 지혜가 헛되다는 사실(1:12-18), 그리고 이 세상의 쾌락이 헛되다는 사실(2:1-11)을 깨닫고 더 이상 헛된 세상, 헛된 지혜, 그리고 헛된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오는 세상, 하늘의 지혜, 그리고 헛된 쾌락이 아닌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고(시43: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26절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누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어떻게 행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 전도서 2장 12-26절 말씀 중심으로 한 2 가지로 생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죽음의 관점으로 자신의 지혜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12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 이미 솔로몬 왕은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습니다(1:17). 그렇게 마음을 써서 지혜를 알고자 했으나 그의 결론은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오늘 본문에 와서 다시금 자기 생각을 돌이켜 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 있습니다(2:12-17). 분명히 그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말하였는데(1:18) 이렇게 다시 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스스로 번뇌(근심)의 길을 또 다시 걷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한 번뇌와 근심 속에서 솔로몬 왕이 던진 질문은 ‘자기 뒤에 오는 후임자가 이미 자기가 이룬 것 외에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12절하). 그는 자기가 죽은 후 자기의 자녀와 후손들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자기의 지혜를 좇아 자기가 이룬 것 외에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마음으로 준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 중 하나는 자녀,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 왕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우리가 이 땅에서 칠·팔십 살아오면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를 자녀,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또한 솔로몬 왕처럼 죽음 앞에서 우리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그들의 앞길을 인도해 주고자 우리의 삶의 지혜를 남겨둬야 합니다. 근데 여기에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우리 자녀, 후손들에게 남겨놓은들 과연 그들이 우리의 지혜를 가치 있게 보고 쫒을지 안 쫒을지는 우리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솔로몬 왕처럼 쾌락을 누려보고자 하여 실험적으로 술도 취해보고 사업도 크게 하여 부도 누려보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여자들도 많이 접해 보고 등등 다 해본 후 이것이 무익하고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죽기 전에 혹은 그 전에 우리 자녀들에게 또한 더 나아가서 후손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아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이 우리의 교훈을 듣고 과연 우리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므로 말미암아 ‘아 내 아버지가 쾌락을 누려보고자 실험적으로 해 본 것들 나는 절대하지 말아야지. 오히려 난 내 아버지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으면서 순종의 기쁨을 맛보면서 살아야지!’라고 할런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 자녀, 후손들이 우리의 지혜를 가치 있게 여겨서 우리 삶에 터득한 지혜의 교훈을 겸손히 받아 순종할까요? 두렵지만 드는 생각은 아무리 우리가 우리 자녀, 후손들에게 우리의 삶으로 배운 교훈을 가르친다 하여도 그들 또한 우리처럼 우리의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직접 자기가 쾌락에 빠져보고 나서야 ‘아 그 때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지 않을까 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바로 전도서 1장 9절 말씀 때문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미 우리가 한 일을 후에 우리 자녀들이 또 다시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세상에서 실험적으로 또는 실수로 경험하여 터득한 것들을 자녀들, 후손들에게 가르쳐 줘도 그들은 듣지 않고 우리가 범한 실수를 그들 또한 범할 가능성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러기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뿐이니라”(2:12).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13절). 어떻게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납니까? 14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어떻게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뛰어납니까? 지혜자는 눈이 밝아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주어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드려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지혜롭게 살아가지만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면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습니다(위어스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죽음의 관점으로 지혜자와 우매자를 바라보았을 때,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4절하).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이 깨달은 것은 지혜자가 우매자나 그들의 결국은 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혜자나 우매자나 죽은 후에는 다 잊힌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심중에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15절상)라고 말하면서 “이것도 헛되도다”(15절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만사가 헛되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그는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다 라고 말하였습니다(17절).

 

왜 솔로몬 왕은 자기의 생을 한탄했습니까? 왜 미워했습니까? 그 이유는 솔로몬 왕은 해 아래서 하는 일이 자기에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17절). 결코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자에 삶에 대한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결코 한탄하며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삶을 사랑합니다(벧전3:10)(위어스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죽음의 관점으로 자신의 지혜를 바라보면서 헛된 지혜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남은 주어진 인생을 위로부터 온 지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롭게 살아드립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우매자들처럼 눈이 어두워 어두움에 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눈이 밝아 빛 가운데 다니면서 빛 되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갑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아드려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자는 죽음의 관점으로 자신의 수고를 생각합니다.

 

솔로몬 왕은 죽음의 관점으로 자신의 지혜를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삶을 한탄한 후(17절) 해 아래서 자기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습니다(18절). 오늘 본문 18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왜 솔로몬 왕은 해 아래서 자기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탄하였습니까?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목사님은 한 3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자신이 수고한 모든 수고를 통해서 얻은 부(wealth)를 자기가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1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솔로몬 왕은 죽음의 관점으로 자기가 수고하여 얻는 분복인 모든 물질들, 자신의 부를 생각해 볼 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그 부를 자기가 가지고 갈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가 죽은 후 자기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는 자기의 모든 수고를 한탄하였습니다. 지난 주 한국 뉴스를 보니까, 한국의 어느 대 기업 전 회장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한 때 부를 누렸던 큰 기업의 회장이 결국 부를 자녀들에게 남기고 가기보다 빛(채무)만 떠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형제간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았었는지 동생이 그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을 때에 있었던 일들도 뉴스를 통해서 접하면서 과연 죽은 이 고인이 인생의 마지막에 자녀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자녀, 후손들에게 남기고 갈 것입니까? 우리가 죽음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둘째 이유는, 자신이 수고한 모든 수고를 통해서 얻는 부(wealth)를 자기가 보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19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솔로몬 왕은 죽음의 관점에서 자기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를 생각해 보았을 때 자기가 분복으로 얻은 모든 부를 자기고 가지고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자기 자녀에게 다 물려주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그는 한탄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칠, 팔십 평생 수고해서 이루어 놓은 것이나 얻은 물질들을 죽기 전에 다 자녀에게 물려주고 떠나려고 할 때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미련하여서 여러분이 평생 이뤄 놓은 것이나 얻은 물질을 다 허비할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 얼마나 허무하고 참 자신의 수고를 한탄하겠습니까? 바로 솔로몬 왕이 이러한 한탄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보호할 수도 없는 모든 수고로 얻은 물질들, 자신의 부를 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

게 다 물려주고 가야 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 왕이 죽은 후 그의 후임자인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 때 이스라엘 나라는 두 개로 나눠져서 북쪽은 여로보함, 그리고 남쪽은 르호보암이 치리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기회들을 다 낭비하였습니다(맥아더).

 

상상이 되십니까? 솔로몬 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기 후세대인 아들 르호보암 시대 때에 자기가 평생 수고하여 이뤄놓은 이스라엘 나라가 두 나라로 나눠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로몬 왕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 장차 일어날 일을 알고 있으면서 해 아래서 자기가 한 모든 수고를 생각해 볼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평생에 수고하여 얻는 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우리는 그 물려 준 것을 우리 자녀들을 위해 보호해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그리고 우리가 죽은 후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자녀들이 다 관리할 때(19절) 다 탕진할지 아니면 지혜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남겨둔 물질을 잘 사용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결국 그는 죽음의 관점에서 해 아래서 수고한 자기의 모든 수로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실망하였습니다.

 

마지막 셋째 이유는, 자신이 수고한 모든 수고를 통해서 얻는 부(wealth)를 우리가 즐겨야 할 만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이 수고한 모든 수고를 통해서 얻은 부를 자기 일생에 즐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본문 21절에서 23절 말씀을 보면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자기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기에 이것도 헛된 것이요 큰 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1절). 또한 그는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22절)

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이러한 결론을 내립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3절). 무슨 말입니까? 일평생 근심하며 애써 수고하여 얻는 것이 슬픔뿐이라는 말입니다. 솔로몬 왕은 밤에도 쉬지 못하고 신경 쓰면서 일평생 열심히 수고한 결과가 슬픔뿐이기에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1, 23절).

 

이렇게 솔로몬 왕은 죽음의 관점으로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수고를 생각해 볼 때 내린 결론은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그가 깨달은 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24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솔로몬 왕은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수고가 헛됨을 고백하면서 깨달은 교훈은 ‘사람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으로 낙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로서 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먹고 마시면서 우리의 수고로 만족을 누리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물질생활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지 우리가 우리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로 누리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을 떠나서 누가 먹으며 또 즐거워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5절).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물질의 축복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26절). 어느 정도로 누리게 하시는가 하면 죄인들에게 노고를 주사 그들로 하여금 수고하여 모아 쌓게 하신 물질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게 하십니다(26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죄인에게는 이 땅에서 수고(고생)하여 얻은 물질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죄인들의 물질도 누리게 하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누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낙을 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