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쾌락

 

 

[전도서 21-11절 말씀 묵상]

 

 

쾌락주의란 무엇입니까? 인터넷 위키 백과사전을 보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 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원리로 삼는 윤리설이다’(인터넷). 결국 쾌락주의란 쾌락은 본질적 선이며 고통은 악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증진하는 것은 모두 선이라고 주장하는 행복주의의 한 형태입니다(인터넷). 쾌락주의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된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쾌락주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가 생각납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헬레니즘 시대의 경향을 대표하는 철학 중 하나로서(다른 하나는 스토아학파) 기원전 300년경에 등장했는데 이 학파의 창시자는 에피쿠로스입니다. 이 학파는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통해 행복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인터넷). 이 학파는 순간적·감각적·육체적 쾌락보다는 영원한 정신적 쾌락을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는 순간적이고 감감 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에는 욕망이 개입되어있고, 그 욕망으로 인하여 고통이 비롯되기 때문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육체적인 쾌락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적 욕망은 무한한데 그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므로 고통 없는 쾌락을 추구했던 이 학파는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정신적 쾌락에도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지적 욕구) 그것을 최소화하므로 말미암아 고통도 최소화 할 때 인간은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을 최소화한 상태를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번뇌가 없는 마음의 평정 상태”라고 부릅니다(인터넷). 이 학파는 마음의 평정을 이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으로 본 것입니다. 이 학파 외에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 학파는 “키레네학파”라고 합니다. 이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이 학파의 창시자이자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아리스티포스가 처음 내놓았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덕이 있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덕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며, 이러한 즐거움은 쾌락의 충족으로 얻어집니다. 쾌락은 유일한 선이자 최고의 선입니다. 키레네학파의 사상가들은 미래가 우리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지금 당장의 감각적·육체적 쾌락을 강조했습니다. 아리스티포스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 즉 철인은 현재를 즐길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쾌락주의의 이상은 육체적인 욕망을 추구하되 지혜로써 쾌락을 지배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1절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이 “시험적으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여 낙을 누리게 해 보려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시험적으로 쾌락을 추구한 것입니다(1-2절). 오늘 본문 1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여기서 “너를 즐겁게 하리니”란 말씀은 솔로몬 왕이 자기 자신을 희락 또는 쾌락으로 시험해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자기로 하여금 쾌락을 누리게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그가 시험적으로 쾌락을 누려보려고 시도한 것들이 오늘 본문에서 한 3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3 가지를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 헛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솔로몬 왕이 쾌락을 누려보려고 시험적으로 시도해 본 것은 바로 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3절을 보십시오: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하여.” 솔로몬이 제일 처음으로 시험적으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해보려고 시도한 것은 바로 ‘술’이였습니다. 그는 술로 자신의 육신을 즐겁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로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술 마심에 있어서도 자기의 마음의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을 즐겼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키레네학파의 주장처럼 술을 즐기되 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어 지혜로서 술을 지배하면서 솔로몬 왕은 술을 즐겨 마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키레네학파의 주장처럼 술의 쾌락을 자신의 지혜로 지배하는 가운데 술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음을 취하여서”였습니다(3절). 한 마디로, 솔로몬 왕의 결론은 ‘술 취함으로 쾌락을 누려보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술이 주는 쾌락이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것일까요? 인터넷 한 기사를 보니깐 술을 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마시는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터넷): ‘월요일은- 월래가 마시는 날; 화요일은- 화끈하게 마시는 날; 수요일은- 수시로

마시는 날; 목요일은- 목을 롱해서 마시는 날; 금요일은- 금 방 마시고 또 마시는 날; 토요일은- 토 하도록 마시는 날; 일요일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시는 날. 그 인터넷 기사에 또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잔은- 건강을 위하여 마신다고 하나, 얼큰하면 - 쾌락을 위하여 마시게 되고, 취하게 되면 - 방종한 행동을 하게 되고, 만취가 되면- 광기를 부리게 된다(인터넷).” 술을 마시는 이유 중 하나는 기분이 좋아서 일 것입니다. 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알코올을 조금 마시면 처음에는 중추 및 말초신경이 흥분되고 위산 분비가 촉진되며 또한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 전달물질이 분비되므로 말미암아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술을 과음하거나 장기간 남용 또는 과용하면 술이 불행하게도 뇌세포 파괴를 촉진시켜 우리 뇌의 기능을 억제시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매일 십만 개씩 뇌세포가 자동 사멸하는데, 알코올을 다량으로 마시면 더 많은 뇌세포가 죽습니다. 학업이나 기억 또는 사고능력 모두 저하되는데, 이들의 저하는 알코올의 농도에 정비례하여 나타난다고 합니다. 알코올을 과음하면 취중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소위 ‘필름이 끊기는 현상’이 나타납니다(인터넷). 또 다른 사람은 술을 이럴 때 자기는 마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나쁜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친해지기 위해 술을 마신다. 고백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리운 사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속이 상할 때 술을 마신다. 누군가 보고플 때 술을 마신다. 마음이 울적 할 때 비가 올 때면 술을 마신다. 피로에 지쳤을 때 술을 마신다. 단합을 위해 술을 마신다. 호기심에 술을 마신다. 외로우면 또 술을 마신다”(인터넷).

 

저 같은 경우는 사춘기 때 방황하면서 술을 마시게 된 이유는 지금 뒤돌아보면 호기심이 제일 작용이 많이 된 것 같습니다. 친구들 따라 강남 간다고 저 또한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취하기까지 하여 토해본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 때 대학부 수련회를 통하여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고 나니 술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친구들을 만날 때 술좌석에는 자주 있어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느꼈던 것은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유익함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저는 술로 인하여 전에 어울려 다녔던 친구들 중 두 명이 총에 맞아 죽는 일도 생겼습니다. 아직도 그 친구들의 장례식 때 이런 저런 기억들이 납니다. 술이 주는 유익함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술은 무익한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성경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가 홍수 후 하나님께 복을 받아(1절) 누리는 가운데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20절) 하루는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있었던 이야기(21절)가 나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자였는데(6:9) 그가 이렇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노아의 모습을 생각할 때 성경 마태복음 24장37-39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지금 이 시대가 노아의 때처럼 먹고 마시고 하면서 멸망의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시대라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쾌락에 도취해 있는 것 같습니다. 부귀영화에 도취해 있는 것 같고 성적 쾌락에 도취해 있는 것 같고, 이런 저런 것들에 중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술 중독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솔로몬 왕은 술 취함에 있어서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술 취함이란 어리석음을 취하는 것이다’.

둘째로, 솔로몬 왕이 쾌락을 누려보려고 시험적으로 시도해 본 것은 큰 사업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4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솔로몬 왕은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3절하) 시험적으로 시도해 본 두 번째 일은 바로 큰 사업 경영이었습니다(4절). 여기서 그가 시도한 큰 사업 경영이란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집들이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4절 하반 절),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고(5절)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판 것을 말합니다(6절). 그리고 이 모든 집이나 포도원이나 여러 동산과 과원 등을 관리해야 하니 솔로몬 왕은 노비도 사기도 하고 또한 집에서 종들을 낳게도 하였습니다(7절). 왜 그는 이렇게 사업을 크게 한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시험적으로 쾌락을 누려보려고 한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은 ‘부(wealth)’였습니다. 오늘 본문 7절 하반 절-8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솔로몬 왕은 자기 개인을 위하여 이렇게 세상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타락한 것은 평안한 때에 된 것입니다(대상22:9)(박윤선).

 

우리도 솔로몬 왕처럼 평안할 때 사치스런 생활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치스러운 생활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인격을 타락시킵니다(박윤선). 사치란 무엇입니까? 사치란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뜻합니다(인터넷). 인터넷 오마이 뉴스를 보니깐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쓰인 기사가 있어 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가시에 김난도란 사람은 “사치의 나라 럭셔리 코리아”에서 사치품을 구입하는 유형을 크게 4개로 나누고 있습니다: '과시형 사치', '질시형 사치', '환상형 사치', ‘동조형 사치:

 

(1) 과시형 사치란 흔히 부자들이 계급적인 특성을 의식해 구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남들과 같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소유한 그들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본으로서의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사치란 그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질시형 사치란 가짜부자들이 진짜부자를 흉내 내기 위해서 하는 사치입니다. 이들은 그들을 질시하면서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칩니다. 그래서 여력이 없음에도 사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3) 세 번째 구매 유형인 환상형 사치는 초라한 것을 두려워하고 변신을 꿈꾸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강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무리해서라도 비싸고 유명한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것의 덕으로 자신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기애가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환상형 사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마지막은 '동조형 사치'입니다. 이것은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수준을 맞추려고 구매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친구들이 모두 비싼 브랜드의 옷을 입었기에, 나도 입어야 한다는 심리가 그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특히 청소년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산다"는 논리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무리해서라도 사치품을 구입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는데 문제는 이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수에 넘게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세속에 풍자돼 나도는 미국 이민사회야야기 하나가 있어 나눕니다: “미국 이민을 왔을 때 엘에이(Los Angeles)간 사람은 셋방살이를 하더라도 먼저 고급 승용차를 사고, 뉴욕 간 사람은 먼저 비즈니스 업체를 구입하며 시카고로 온 사람은 우선 집부터 장만한다고 한다. 이것은 뉴욕과 시카고 이민자들은 실속을 차리고 자신의 분수를 지켜 앞으로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는 데 비해 엘에이 이민자들은 외화내빈으로 남의 눈을 먼저 의식하고 체면을 생각하는 외형적 사고방식을 빗대 한 말이다(사실은 아니지만)”(인터넷). 여러분은 ‘수분지족(守分知足)’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분수를 지키는 것을 수분(守分)이라 하고 분수를 아는 것을 지분(知分)이라 하며 분수에 만족하는 것을 안분(安分)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자신의 분수가 있습니다. 제 분수를 바로 알고 제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하며 제 분수에 지나치게 과한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자기 분수에 지나치는 것은 ‘과분(過分)’이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한문의 ‘과(過)’는 두 가지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나침’ ‘과’요 둘째는 ‘과심’의 ‘과’입니다. 지나치면 반드시 실수를 합니다. ‘과’는 불행의 원인이고 질병의 요인이 됩니다. 과식ㆍ과음ㆍ과로ㆍ과색ㆍ과용 등은 모두 건강을 해치고 행복을 좀먹습니다. 분수를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일이나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생활에 만족할 줄 알아야하고 머무를 자리에서는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인터넷). 우리는 소유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솔로몬 왕처럼 사업을 크게 경영하는 사람들은 소유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소유욕이란 절대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 왕을 보십시오. 그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지만(7절)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았습니다(8절). 이 모든 것들을 자기 것들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은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원하는 욕망이 바로 소유욕입니다. 결국 이러한 소유욕 또한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이 두 번째 시도인 사업을 크게 하는 경영 또한 “어리석음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3절).

셋째로, 솔로몬 왕이 쾌락을 누려보려고 시험적으로 시도해 본 것은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처와 첩들을 많은 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성경 신명기 17장 17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에 대하여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런데 솔로몬 왕은 이 계명을 어겼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 서로 통하지 말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통하지 말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왕상 11:1-3). 하나님께서 이렇게 금하신 이유는 그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이방인 신들을 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절). 그런데 한 나라의 지도자인 솔로몬 왕은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1절). 그에게는 후비가 700명, 빈장이 300명이나 있었고(3절) 이들이 솔로몬 왕의 마음을 돌이켜(3절) 왕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습니다(4절). 결국 솔로몬 왕에게 있어서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하였던 문제는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간음의 죄까지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행하는 육체적 간음 행위는 결국 영적 간음의 죄악 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 야후 인터넷 뉴스 기사에 ‘하나님의 뜻으로 성관계’ … ‘여신도 성폭행한 목사’란 제목 아래 글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0: “10여 년간 여성 신도들을 성폭행한 T종교단체 목사 A씨(46)에 대해 준 강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A씨는 서울 동작구에서 T 종교단체를 결성한 후, 지난 10여 년간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는 것이며 나와 성관계를 하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며 총 6명의 20대 여성 신도들을 수십 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여기서 T 종교단체가 리플을 보니까, “통일교”란 말도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이러한 성적 타락의 범죄행위는 우리 기독교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말할 때 우리는 ‘성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성욕’은 식욕 및 수면욕구와 더불어 인간의 3대 욕구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인터넷).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어서 육체적인 욕망인 성욕에 빠져들어 포로가 되면 강간 같은 심각한 죄를 범합니다. 성욕이 충동적인 방향으로 폭발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강간입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행되는 상류층의 부부 스와핑(swaping), 아예 결혼이라는 개념조차 없애버린 변화무쌍한 동거,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거침없는 혼전 성교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너무도 쉬운 이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폰 섹스나 화상 섹스, 카메라 폰이나 컴퓨터 카메라들 통한 즉석 음란 화상 전송, 인터넷 채팅을 통한 청소년 성매매, 중고대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초등학생에까지 확산되는 성 경험의 급속한 증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까지 중독을 일으키는 인터넷 혹은 사이버 포르노! 이렇게 날이 갈수록 자극적, 노골적, 변태적이 되어 가는 우리의 성(性)문화를 보노라면, 성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고, 또 성욕은 본능에 따라 때와 장소 혹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음껏 발산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인터넷). 참으로 심각한 사회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사회는 부부 사이에 한번쯤 바람피우는 것은 기본이라는 인식이 세상에 만연한 것 같습니다. 성적 쾌락이 난무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의 쾌락 추구 가운데 육체적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솔로몬 왕이 쾌락을 알고자 자기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과 큰 사업을 통한 부와 소요물들, 그리고 육체적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누렸던 1000명의 여인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결론적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전도서 2장 1절 하반절과 2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즉, 솔로몬 왕은 시험적으로 자기 자신을 괘락주의에 빠져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여 낙을 누려본 결과 그의 체험적인 결론은 바로 “이것도 헛되도다”라는 것입니다. 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헛된 것입니까? 쾌락이 헛되다는 것을 솔로몬 왕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바로 그는 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다시 말하면, ‘쾌락이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What does pleasure accomplish?)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대답을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절). 결국 그는 무엇이든지 자기의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아니하고 누려보았지만(10절)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내란 결론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쾌락은 헛되고 무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헛되고 헛된 세상, 추구했던 쾌락이 실제 체험적으로 헛되고 무익하다는 결론을 내린 전도자 솔로몬 왕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저는 그 대답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즐긴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시43:4). 그리고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지킵니다(전12:13). 그러므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요15:9-11). 이것이 바로 순종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기쁨을 누렸던 사도 바울은 주님이 명령에 순종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가리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빌4:1).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우리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 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더욱더 많아져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일세.

 

  •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찬송가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을 수요기도회 때 찬양한 후,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의 최고의 기쁨이 되시는 주님을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