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세상

 

 

[전도서 11-11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인생은 덧없다”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인생을 논한다면 “덧없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 ‘덧없는 인생’에서 ‘덧’의 사전적 의미는 ‘사이’, ‘동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덧없다’는 말은 ‘사이가 없다’, ‘동안이 없다’로서 ‘상주함이 없다’, ‘빨리 변한다.'는 뜻에서 ‘무상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인터넷에서 이 단어를 뒤져보다가 일장춘몽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장춘몽’이란 단어의 의미는 ‘한바탕의 봄꿈’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인터넷).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일생을 일장춘몽이라고 하나봅니다. 시편 기자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시90:12). 우리 또한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에는 두 가지 기도 내용이 내포되있습니다. 그 두 가지 의미란 “인생의 허무함을 가르치소서”와 “인생을 가치 있게 지내야 할 것을 가르치소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세 가지입니다:

 

(1) 첫째로, 인생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에 허무합니다. 성경 시편 90편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2) 둘째로, 인생은 잠깐이기에 허무합니다. 성경 시편 90편 4-6절을 보십시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 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 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3) 셋째로, 인생은 일평생 수고와 슬픔뿐이기에 허무합니다. 성경 시편 90편 1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오늘 본문 전도서 1장1-11절은 전도서 전체에 대한 서론 부분입니다. 이 서론 부분을 두개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1절입니다. 이 성경 구절은 전도서의 저자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인 솔로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이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2-11절입니다. 이 성경 구절은 세상이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헛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이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2절). 이 고백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져보고 누려보았던 전도자 솔로몬 왕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결론적인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바로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솔로몬 왕이 말하는 ‘헛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 의미는 바로 ‘입김(breath)’입니

다. 이것은 “견고하고 지구성 있는 것과 반대되는 덧없는 것을 비유합니다"(시90:9)(박윤선).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님은 전도서 전체에서 이 ‘헛되다’라는 단어는 적어도 한 3가지 의미로 전도자 솔로몬 왕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의미는, 해 아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은 덧없다(fleeting)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기에 헛되다는 말입니다(약 4:14).

 

2) 둘째 의미는, 해 아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무익하다(futile) 혹은 무의미하다(meaningless)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 우주의 저주받은 상태에서 사람의 이 지구상에서의 경험에 끼친 약하게 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3) 셋째 의미는, 해 아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 혹은 불가사의하다(enigmatic)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심사숙고한 가운데 내리는 결론입니다(맥아더).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헛된 세상이란 제목 아래 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헛된지 한 4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의 헛됨을 좀 더 철저히 깨닫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이 헛된 세상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억된바 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헛된 세상입니까?

 

첫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아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말씀은 해 아래서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유익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시편 90편 1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시90편)는 칠·팔십사는 인생, 그것도 신속히 날아가는 인생, 그 년 수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칠, 팔십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모든 수고를 통해서 무엇을 남겼는가 생각해 볼 때 저와 여러분은 뭐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전도자 솔로몬 왕은 전도서 5장 15-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는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람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수고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업적은 그의 사후에 남을 것이 없”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3)(박윤선).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한 평생 사는 인생은 결국 별 수 없이 티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장 5-6절을 보십시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의기양양하여 한평생 활동하지만 별 수 없이 티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아무리 젊었을 때 혈기가 왕성하고 든든히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시39:5) 결국 사람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벧전1:24-25). 결국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시39:6). 우리 인생은 바람과 같습니다. 마치 바람이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결국에는 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6절) 흙으로 온 우리 인생도 결국 나중에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인간의 욕심에는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장 8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눈이나 귀가 보고 또한 들어도 족함이 없다는 이 말씀은 마치 바다가 언제가 흘려오는 물로 차지 못함 같이(7절) 사람의 욕심도 만족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참으로 우리 사람의“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요일2:16). 우리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가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전4:8). 그런데도 우리는 그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키고자 이 헛된 세상에서 이것저것을 추구해 봅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솔로몬 왕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그는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습니다'(2:10).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누려보았던 솔로몬 왕, 자신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라고 말하였지만(2:10) 결국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절). 결론적으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27:20).

 

요즘 과학이 많이 발달하면서 이런 저런 새로운 기계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새로운 기계들이 우리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계속 새로운 것들이 나올 텐데, 나오면 나올수록 계속 살 것이지만 그것들을 사더라도 결코 우리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전도서 3장 11절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순간적인 것들로 절대 만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아무 유익이 없는 무익한 일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됩니다.

 

마지막 넷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 1장 11절을 보십시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솔로몬 왕은“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9- 10절). 이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에는 새 것이 없고 이전 것을 거듭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러한 가운데서 솔로몬 왕은“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절)

(박윤선). 아무리 지금 현재 사람의 부와 권력과 힘 등이 많다고 할지라도 죽으면 무엇이 남습니까? 죽어서 세월이 흘러가면 다 잊히는 것들이 아닙니까?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것입니다(3절). 그리고 지나간 세대는 기억함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사자가 살았을 때에는 산중의 왕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 뼈를 개가 물고 다닌다고 합니다(박윤선). 죽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은 사자보다 살아있는 개가 더 낫습니다. 아무리 살아있을 때 이런 저런 것들을 다 누려보았다 할지라도 죽음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잊힙니다. 참으로 헛되고 헛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헛된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첫째로, 이 헛된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업적은 그의 사후에 남을 것이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10:10). 우리는 지혜를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약1:5)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3:17-18).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 헛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헛된 세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성공한 인생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업적을 남기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39:4).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다윗처럼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종말과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이 헛된 세상에서 주어진 짧은 칠·팔십 인생, 우리는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그 대답을 전도서 7장 2절 말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즉, 우리는 죽음의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시90:12) 하나님께 서 주시는 지혜로 이 땅에 주어진 제한된 값진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자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 아삽은 시편 73편 2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이 헛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영혼은 영원을 사모하기 때문에 영원한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풍부함과 궁핍함 가운데서, 즉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빌4:11). 우리는 예수님 한분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가 되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후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자녀들과 손자들까지는 모르겠지만, 지나면 세월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사43:4).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바 된 사람이었습니다(행

10:4). 우리도 고넬료처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기도와 구제의 삶을 살았던 고넬료처럼 이 헛된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게 살아가므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바 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헛된 세상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세상, 다시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 헛된 세상에서 욕심을 부려보지만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기에 이 세상은 헛된 세상입니다. 또한 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함이 없기에 이 세상은 헛된 세상입니다. 이러한 헛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 헛된 세상에서 유익하게 살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주어진 기간 동안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하나님께 기억된바 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헛된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께 기억된바 되는 인생을 이 땅에서 살다가 주님의 품 안에 앉기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