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

 

 

 

[사도행전 28장 1-10절 말씀 묵상]

 

 

구약 성경 사무엘상 22장1-2절을 보면 “아둘람 굴”이란 곳이 나옵니다. 여기서 ' 아둘람'이란 '피난처', '보호처'란 뜻입니다. 이 아둘람 굴은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 하여 가드란 곳으로 피신 갔다가 가드 왕 아기스도 심히 두려워하여 피신한 곳입니다. 그 런데 다윗이 이 아둘람 굴에 피신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의 부친과 형제와 모든 집안사 람들도 그 곳으로 내려갔습니다(1절). 이는 한 사람이 반역에 걸리면 모든 식구들이 처형을 받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환난 당한 사람들과 빚진 자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모여들었으며,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약 400명 정도 되었습니다(2절). 최 근에 성서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탐사하던 중에 아둘람 성의 한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 가 살기에 적합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Conder, Robinson). '환난 당한 자'는 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며, "빚진 자"는 사울 왕국의 부 당한 세정이나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대금업 등으로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며, " 마음이 원통한 자"는 사울 왕국의 비도덕적이고, 불경한 행동을 인해 심적. 영적으로 상처 를 입고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들이 있었습 니다(5, 대상 12:1-18).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타락하고 쇠퇴해가던 사울 왕국에 서 침묵하고 안주하기보다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 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 당하기를 기뻐하여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피 난처라는 뜻을 가진 아둘람 굴에 모여든 빚지고 원통하고 한 많은 다윗의 400 용사들이 그 곳에서 쉼을 얻고 그 영혼이 치유되어 통일 이스라엘의 새로운 꿈을 꾸었습니다. 이들처럼 83년 UBF 유학생 선교사로 독일 땅을 밟은 한 선교사님 권영선 씨(레베카 권)는 한국의 교 회와 선교단체들의 개혁의 꿈을 꾸면서 “아둘람으로 가는 길”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 글 내용 중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개혁은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닌 항상 현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외부적인 조직의 형태를 바꾼다고 개혁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의 식, 무의식이 변화되어야 합니다”(인터넷).  우리 각자가 변할 때 교회가 변할 것이고 교회 가 변해야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을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28장 1-10절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점검 해 보면서 비성경적인 생각이 있다면 버리고 성경적인 교회 관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변화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28장 1절을 보면 태풍으로 인하여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었던 사도 바울 과 나머지 275명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극적인 간섭으로 인해 배에 승선했던 276 명 전원이 살아남아서 “멜리데”(몰타)란 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멜리데”(몰타)란 섬은 시실리(Sicilia) 섬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서 “멜리데”란 섬 이름은 “피난처”란 뜻이 있는 이 름입니다(박윤선).   여기서 바울과 나머지 275명은 섬 원주민들로부터 지극한 대접을 받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여 주신 모든 276명의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셨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극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및 배에 타고 있던 275명에게 피난처를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이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일들 중심으로 과연 피난처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이 세우시는 우리 공동체가 이러한 피난처가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피난처에는 열린 마음의 영접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275명의 사람들이 큰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후(1 절) 도착한 멜리데란 섬에서 토인들, 즉 헬라어가 아닌 그들만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영접을 받았습니다(유상섭). 오늘 본문 사도행전 28장 2절을 보십시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 더라”. 그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든 로마 군인들 이던 또한 부자였을 선장과 선주이던 또한 나머지 죄수들 이던 “다 영접”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피난처의 모습입니까? 구분과 차별을 하면서 누구는 영접하고 누구는 영 접 안하고가 아니라 모두 다 영접하는 이 토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바 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 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한다고 원망하였습니다(눅15:2).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들은 죄인들을 차별화하였고 비판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죄악 된 일들이 오늘날 교회 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화하고 비판하고 등등 주님의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의 원인은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을 낮게 보고 우습게 여기고 업신여기며 비판하는 영 적 우월감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들처럼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 자매를 바라봐서는 아니 됩니 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를 비판하여 원망해서는 아니 됩 니다. 우리를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라는 빌립보서2장3절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 한 가운데 서로를 주님의 마음으로 영접하므로 “멜리데” 섬과 같은 피난처가 돼야합니다. 히스패닉 사역의 사람들이던 영어사역에 사람들이던 한국어 사역의 사람들이던 나라와 문화 를 초월하여 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접하는 우리 공동체, 남자던 여자든, 부자이던 가난 한 사람들이던 세상 에서 차별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이름으로 다 영접하는 그러 한 우리 공동체가 되길 기도하며 노력하고 싶습니다.

 

둘째로, 피난처에는 특별한 친절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8장 7절을 보십시오: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 더니.” 멜리데 섬에 사는 토인들뿐만 아니라 그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사 람도 바울과 그의 일행을 영접하되 3일간 친절하게 접대하였습니다. 멜리데 섬에 제일 높 은 보블리오란 사람은 3일 동안이나 바울과 그의 일행을 영접하여 친절히 유숙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276명 다 보블리오 집에 유숙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우리”라 함은 적어도 바울과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분명히 보블리오 집에 거했지만 그 외에 또 누가 그 의 집에 유숙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 문을 열고 모르는 사람들을 영 접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 3일이나 유숙하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을 영접하되 자기 집까지 들여 3일 동안 유숙하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는데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친절을 온유함이라고 번역 하고 있습니다[“사랑은 온유하고”(고전 13:4)].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온유 곧 친 절해야 됩니다.

 

톨스토이는 친절에 대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친절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며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그리고 얽힌 것을 풀어 헤치고,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인터넷). 이러한 친절함이 우리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드는 친절이 있어야 합니다.  비난을 없애며 얽힌 것을 풀 어 헤치며 서로의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드는 친절, 암담한 것조차 즐거움으로 바꾸는 친 절이 우리 교회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진정한 피난처가 돼야 합니다.   차별 없 는 영접과 더불어 친절한 대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친절이 있어야 합니다(딛1:8).   특히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모르는 분들을 마음 문을 열고 그 모습 그 대 로 영접하며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친절한 언행으로 말미암아 그 분들로 하여금 환영 받는 느낌을 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아름다운 피난처-공동체를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피난처에는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가지 이적과 두 가지 치유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 한 가지 이적 이란 멜리데 섬에서 바울이 독사에 물렸음에도 불구하고(3절) 죽지 않고 아무 이상 없는 하 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5절).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처 음엔 살인한 자로 여겼었지만 (4절) 나중에 바울이 독사를 그냥 불에 떨어 버리면서 조금도 상함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바울 을 향하신 그의 뜻을 이루시고자 지난 14일 동안 태풍 가운데서 배가 파손되는 상황에서도 바울을 구원해 주셨으므로 독사에게 물린 바울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유상섭).

 

여기서 한 가지 피난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교회란 피난처에는 아무 상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5절).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요즘 교회 안에서 상처 입는 사람들 이 너 무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장로님, 집사님 등 온 교회 식구들이 서로를 영 접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보다 욕심 가운데 다투고 싸우는 가운데 옆에 있는 사람들 까지 상처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 회는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어 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치유의 사건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 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보불리오라의 부친을 치유하였습니 다. 보물리오의 부친은 열병과 이질에 결려 누워있었는데 바울이 안수 기도하여 치유하였 습니다(8절). 그 결과 그 사실을 알고 온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 또한 바울은 예수님 의 치유의 능력으로 다 치유하였습니다(9절). 이러한 치유의 역사를 생각할 때 저는 우리 공동체가 어떠한 피난처가 돼야 하는지 그 교훈을 호세아6장1절에 받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 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피난처인 교회 안에서는 낫게 하는 사역, 싸매어 주는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남의 과거나 상처를 파헤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마음 문 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방을 그 모습 그대로 영접하며 환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위로와 격려와 싸맴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시편 46편 1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 에 만날 큰 도움이 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환난 중 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그에게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벌리신 팔로 저와 여러분을 영접 하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게 이 모습 이대로 나아갈 때 우리 주님은 특별히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그의 치유의 오른손으로 우리의 아픈 마음, 찢 겨진 마음 등 싸매어 주시고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458장 1절과 후렴입니다: “주 의 친절한 팔에 안기에 우리 맘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 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예수 십자가의 벌리신 팔에 앉기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영접, 친절, 치유가 있는 우리 공동체를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