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도덕 생활

 

 

 

[사도행전 24장 24-27절 말씀 묵상]

 

 

저는 “내 아이 도덕지수 높이는 법: IQ만 좋아서는 안 된다 MQ(도덕지수)높은 아 이가 성공한다”란 인터넷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버트 콜스 교수가 주장 한 것으로, 선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는 IQ(Intelligent Quotient: 지능지수)가 높은 아이보다는 MQ(Moral Quotient: 도덕지수)가 높은 아이가 성공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정보화시대가 도래한 이후로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평생 교육과 자기개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이 지속된다면 10년 뒤에는 웬만한 전문지식만 가지고는 남 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아 이들에게 경쟁력을 키워준다면서 영어니 악기니 운동이니 열심히 시켜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그 모든 것을 잘하고 있는 아이들도 생각보다 꽤 많다. 이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 자신이 모범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헌신과 참여를 끌어내는 도덕지능이라는 것입니다. 도덕지능이 높은 사람이 남을 섬길 줄 알며 함께 성공하는 법을 압니다.   도덕이란 다름 아니라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규 범, 세상을 바로 보는 가치관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60년간 하버드대를 졸업 한 사람들을 추적한 결과, 학교 성적과 성공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유머가 풍부한 사람, 남을 배 려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는 사람 등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우리 눈에 띄는 위기는 도덕성의 상실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은 하 지 않고 옳은 일은 해야 한다는 의지의 실천입니다. 설령 옳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그나마 도덕의 뿌리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옳 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이 해치워버리는 현상을 우리는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그러한 경우를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표현합니다(딤 전4:2). 윤리신학자 R. 니이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외부에 드러 나는 것은 결국 그 삶의 도덕성일 수밖에 없다”(인터넷).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덕성 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 그 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도덕적 수준을 낮춘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4장 24-27절을 보면 바울은 총독 벨릭스 부부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24절) 복음을 믿는 사람이 행해야 할 도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 니다. 그 도덕이란 “의와 절제”(righteousness and self-control)입니다(25절). 여기서 “의”(righteousness)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칭의를 말하기보다 복음을 믿는 사람이 행해야 할 도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유상섭). 도덕적인 행위란 유대인의 총독으로서 벨릭스는 로마법과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모든 것을 공정하고 옳게 처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총독 벨릭스의 양심에는 찔리는 말 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벨릭스는 이와 거리가 먼 부정한 통치를 일관해 온 사람 이였 기 때문입니다(유상섭). 이 바울의 권면은 우리 기독교 정치인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예수 님을 믿는 정치인들로서 도덕적인 행위가 바르고 정직해야 합니다.   결코 부정과 부패를 가 까이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번 주 화요일 오후6시30분, 채널7에서 이락에 대한 뉴스가 나 와서 좀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그 뉴스 내용은 이락에서 그래도 제일 좋다는 병원을 취재 한 것인데 의사를 인터뷰 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제일 기본적인 의료도구나 약품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병원이 이러한 것입니까? 그 원인은 바로 부정, 부패라 고 합니다.   즉, 이락의 그 많은 석유를 하루에 어느 정도 뽑아내서 매일 그 석유로 버는 돈이 참 크지만 정치인들 중 부패한 사람들로 인하여 이락 바그다드 그 유명한 병원에도 제 일 기본적인 것들이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그 돈을 가로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 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렇게 부정, 부패에는 부패한 정치 자금, 즉 돈이 개입되어 있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두 번째로 “절제”(self-control)에 대해서 말하였습니 다. 여기서 “절제”란 각종 욕망의 통제와 억제를 가리킵니다(유상섭).

 

벤자민 플랭크린, 그는 가난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학교라고는 1년 밖에 다녀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교육과 마아트 목사님의 청교도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일하는 것과 독서하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 는 미국의 철학회 창시자가 되었고, 피뢰침의 발명가가 되었고, 초대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 기도 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얻기 위해 덕을 팔지 말고 권력을 얻기 위해 자유를 팔지 말 라는 뼈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그는 어릴 때부터 13가지 덕목을 정해서 평생 지켰습 니다. 그 덕목의 첫 번째는 ‘절제’입니다. 바울도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 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고전10:23). 성경에서는 덕의 최우선 지침을 ‘절제’로 보고 있 습니다. 절제하는 자는 덕을 세우는 것이며, 덕을 세우는 자는 절제하는 자이며, 그는 시험 에 빠지지도 않으며, 시험 들게 하지도 않습니다. 덕은 헬라말로, ‘집을 세운다’는 뜻을 가 지고 있습니다. 덕성은 세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미는 멸망해도 덕 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속담을 가지고 있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에서 왜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이 절제에 대해서 권면하였습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총독 벨릭스는 물질에 대한 욕심(탐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바울을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26절).   아마도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구제헌금을 이방인 교회들에게서 받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고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벨 릭스는 그 돈을 노리고 바울에게 접근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도덕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마음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 니다.   그 이유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딤전6:10).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되기에 돈을 사모해서는 아니 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돈의 욕심을 버 리고 돈에 깨끗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나 돈에 관해 서는 깨끗해야 합니다. 바울이 총독 벨릭스에게 절제에 대해서 권면한 또 다른 이유는 벨릭스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에 의하면 부정, 부패한 총독 벨릭스 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당시 유부녀였던 유대 여자 드루실라(24절)의 빼어난 미 모에 홀딱 반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 아트모스를 통해 그녀를 설득하여 남편을 버리고 자기와 결혼하게 했다고 합니다(그녀는 벨릭스에 세번째 아 내라고 함). 다시 말하면, 총독 벨릭스는 성적 욕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 이였 습니다.  돈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던 사람 이였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또한 복음을 믿는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은 절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덕 생 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바울의 권면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적 욕망을 절제해 야 합니다.  우리는 돈에 욕망도 절제해야 하며 또한 성적 욕망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 는 돈에 관하여서도 깨끗해야 하고 또한 성적으로도 깨끗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목회자들 은 성적 정결함을 도모해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 목회자들이 성적 욕망에 이기지 못해서 교회 안에서 스캔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성도님들의 마음 에 큰 상처를 입히 고 있는지는 여러분도 이런 저런 뉴스를 접하여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왠지 점점 세상 에 악해지면서 우리 사람들의 절제력도 상실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 람들이 점점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죄를 짖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치 않는 죄를 자기도 범하면서 죄 가운데 허덕이 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총독 벨릭스처럼 절제력을 상실하여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바울이 벨 릭스에게 전하였던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도 우리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총독 벨릭 스에게 의와 절제뿐만 아니라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습니다(25절). 아마도 그는 장차 있을 심판을 언급할 때 불신자들이 받게 될 심판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이 땅에 불의와 불법 을 행한 자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마지막 날에 온 세상 을 공의로 심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혔을 것입니다(17:30-31)(유상섭). 그 때 총독 벨릭스는 두려워했습니다(25절). 왜 그는 두려워했습니까? 자신의 죄가 들춰졌기 때 문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며 또한 물질이 욕심과 성적인 욕망 가운데 범죄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벨릭스에게 사도 바울의 권면은 충분히 두려움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는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고 그에게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말했습니다(25절).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과연 총독 벨릭스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24절) 또한 복음의 합당한 생활인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과 절 제 있는 삶에 대해 권면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충격 속에서 변화 되었는가?’입니다. 총 독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복음과 복음의 합당한 삶에 대해서 도덕적인 교훈을 받고 난 후 충격과 두려움 속에서도 바울에게 뇌물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면 그는 변화 받기를 거부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26절).   또한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 류하여 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27절).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부패한 정치가는 자기 지위를 굳히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을 문제지 하지 않습니다(박윤선).

 

과연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덕 생활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복음을 믿는 자들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합니다.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로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올바르고 정직해야 합니다.   또한 절제 력을 상실한 이 시대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절제를 해야 합니다. 물 질의 욕심이던 성욕이던 우리는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덕 지수(MQ)를 높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이 전파해야 합니다.

 

 

 

도덕생활의 수준을 높여야 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모든 종류의 욕망을 절제하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