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당하는 바울

 

 

 

[사도행전 24장 1-9절 말씀 묵상]

 

 

요즘 “고소”(sue)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듣습니다. 물론 뉴스를 통해서 수 없이 듣 지만 교회 안에서도 세상 법정에 고소를 하는 사건을 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서 고소하는 소식을 접할 때 저는 가끔 고전6장 5-6절 말씀을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너 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 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 에서 하느냐.” 주님의 몸 된 교회 한 지체로서 창피하고 부끄러워해야 함을 상기하게 됩니 다. 형제간에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없어서 세상 법정까지 교회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하는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탄은 비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고소하게도 하지만 또한 믿는 성도를 유혹하여 교회를 고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사탄은 교회 를 갈라놓게 하기도 하고 또한 무너트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24장1-9절을 보면 사단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아나 니아와 장로들을 사용하여 사도 바울을 고소하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고소당하는 바울”이란 제목 아래 한 두 가지로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 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라는 변사(변호사)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4장 1절을 보십시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험한 상황에서 로마 군대 천부 장을 통하여 또한 바울의 어린 조카를 통하여 보호해주시고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천부 장은 바울을 무사히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호송하도 록 명하였고 가이사랴에 무사히 도착한 바울은 5일 만 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일부 장로 들이 법정 대변인이 더둘로라 하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내려와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고소 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총독 벨릭스 앞에 정식으로 바울에 대한 고소를 제기하였을 때 총독은 이를 수락하여 바울을 소환했습니다(2 절)(박윤선). 그 때 변호사 더둘로는 총독 벨릭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벨릭스 각하 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3절).   그러나 이것은 아첨에 불구한 말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총독 벨릭스의 유대 통치는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정치적인 불안과 소요를 야기했다”고 합 니다. 사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유대 땅에 유래 없는 최악의 혼란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 났습니다(유상섭). 총독 벨릭스의 집정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었 습니다(박윤선).

 

거짓말로 아첨하면서까지 자기에게 유익한 결정이 나오도록 해보려는 변호사 더둘 로를 생각할 때 저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사람의 세치 혀는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52편2-4절에서 간사한 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 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날카로운 삭도와 같은 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진리보다 거짓을 사랑 하는 간사한 혀, 그 혀로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까지 씌워서 감옥까지 가게 하는 이러한 죄악 된 일들이 요즘 법 정에서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 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고백하였습니 다(살전2:5).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아첨의 말이나 탐 심의 탈을 써서는 아니 됩니다. 입은 복음을 전하라고 있는 것이지 간사하게 사용하여 아 첨이나 하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24장 5-6절을 보면 더둘로란 변호사는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 게 한 4 가지 죄목으로 고소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박윤선):

 

  • 첫째는, 바울이 “염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 여기서 “염병”이란 “마치 온역이나 염병이 사람들에게 퍼지면 무고 한 생명을 죽이 듯이 순진한 백성의 평안을 해치는 극히 해악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유상 섭). 더둘로의 고소는 바울은 벨릭스 총독의 선정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태평 을 해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이 있는 한, 이 땅에 평안과 안정이 있 을 수 없기 때문에 제거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유상섭).

 

  • 둘째는, 바울은 “소요케 하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 천 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 여기서 ‘소요케 하다’ 또는 ‘선동하다’라는 헬라어 “스타시스”는 “폭도나 과격한 무리들이 일으킨 소요를 자칭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 다. 지금 더둘로는 바울을 이러한 자라고 고소하고 있습니다(유상섭).

 

  • 셋째는,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것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 이 말은 바울이 나사렛 인들의 이단의 두목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두목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둘로는 그 집단 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불렀습니다(유상섭).

 

  • 마지막 넷째 고소는, 바울은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이것은 유대인 들에게 있어서 큰 죄로 여겨졌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중심 이었는데 그 성전을 더럽혔다고 더둘로는 바울을 고소했던 것입니다.

 

결국 더둘로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한 이 네 가지 내용을 보면 바울의 죄는 근본적 으로 정치적이고, 이차적으로는 종교적인 범죄로 바울은 심각한 범죄 자므로 마땅히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유상섭).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더둘로의 고소는 거짓입니다. 그저 바울을 제거하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저의를 가지고 거짓된 주장을 폈던 것 입니다. 더둘로는 이렇게 바울에 대하여 거짓 고소를 한 후 총독 벨릭스에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7-8)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일 옳다 주장하”였습니다(9절). 결국 유대 종교 지 도자들인 대제사장 아니나아와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변호사 외에도 모여 있었던 유대인들도 그들 편에 서서 바울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물증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세치 의 혀로 바울을 고소하였던 더둘로, 그는 바울을 “염병”이요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 그리고 “성전을 더럽게 하려”하는 자라고 총독 벨릭스에게 고소하였습니다. 즉, 더둘로는 바울을 인신공격하였습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바울 개인을 공격하되 욕설 을 퍼부었습니다(5절). 과연 우리는 이러한 인신공격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즘 인터넷을 보면 특정 인물을 상대로 인신공격을 무차별하게 하는 것을 종종 봅 니다. 별의 별 욕설을 퍼붓는 글들을 보면서 참으로 이들이 어떠한 근거로 이렇게 말을 막 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객관적인 논쟁을 한다고 말하기보다 감정의 복받쳐 말을 막 쏟 아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느 웹사이트에 올린 글을 보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과학성, 합리성, 정확성, 엄밀성”이 좀 약하고 “감정적, 정서적, 심리적, 대중적으로 움직이 려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말하였는데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더불 로처럼 인신공격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무 물증도 없이 그저 감정 속에서 상대방의 인 격 등을 비방하며 욕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저는 오늘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는 바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 다. 바울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 법정에서 종교적인 죄목으로 재판을 받으셨고(눅 22:66-71) 또한 빌라도 앞에서는 바로 동일한 공회가 정치적인 죄목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 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눅23:1-5, 13-16)(유상섭). 그 예수님처럼 바울도 종교적인 죄목과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라 생 각합니다. 이 길을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요 생명이요 소망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 로 걸어가십시다. 거짓과 아첨을 미워하며 진리를 사랑하며 진실 되게 살도록 힘쓰십시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주님 걸어가신 길을 신실하 게 걸어가십시다.

 

 

 

억울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나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