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사도행전 21장 20b-24절 말씀 묵상]

 

 

여러분은 오해를 사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상대방은 여 러분을 오해하므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20절 하반 절부터 24절 말씀 중심으로 오해는 왜 생기는가 한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본 후 오해를 어떻게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해가 생기는 첫 번째 이유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20절을 보십시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부정 적인 생각이 있으십니까? 만일 “예”라고 대답하셨다면 왜 그렀습니까? 그 이유 중 하나 는 내가 확신하고 꼭 지켜 나아가는 것을 그 사람은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 다.   예를 들자면, 주일날 영화를 보는 것이나 돈을 쓰는 것은 십계명의 4번째 계명인 “안 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어서 주일날 영 화도 안보고 돈도 안 쓰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대해 부 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20절 하반 절에 나오는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는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 는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인데 그들은 바울은 율법에 열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십계명 중 4계 명을 열심히 지키는데 바울은 왜 안 지키는가 하면서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 니다.   율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바울은 율법에 열심히 없는 자로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나의 장점이 나의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 면, 내가 열심히 잘하고 있는 것이 나의 장점인데 그게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에 열심히 있는 것 좋죠. 그러나 이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 에서 율법 순종이 아닌 예수님보다 율법을 더 순종하는 열심히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문제는 율법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지켜 행하 므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습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3장 24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율법 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 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해가 생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거 없는 소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21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 희가 들었도다.” 예루살렘에 있는 수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이방 지역에 흩어 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범을 지키지 말 라는 교훈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21절).   그러나 사도행전 어디에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게 이와 같이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말고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관습(customs)을 따르 지 말라고 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유상섭). 오히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분명하게 세 가지 사례를 들어 바울이 아직도 유대인들 의 관습을 존중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1) 첫째는, 2차 선교 사역 중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이방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성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사건이고(16:2-3), (2) 둘째는, 2차 선교 사역 말기에 자신의 나실 인 서약에 따라 삭발을 한 사건이며(18:18), (3) 마지막 셋째는, 바울이 여전 이 무교절(유월절)을 준수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도 오순절 안에 도착하기 위해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는 것입니다(20:6, 16). 이러한 사실은 명확하게 바 울이 아직도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모세의 율법과 관련된 관습을 준수하고 있었음을 보여줍 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들은 소문인 바울이 모세의 율법으로부터의 배도를 가르친다는 소문이 전혀 근거가 없는 오해임을 명백하게 합니다(유상섭).

 

얼마나 근거 없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오해를 받는 일이 흔합니까? “내 이름은 소 문”이란 제목 아래 애틀랜타 저널(1995년 5월) 나온 글입니다: “난 '소문'이야. 진실을 무 척이나 싫어하지.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람을 망하게 하고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어. 가슴을 찢어놓고 그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지. 교활하고 악한 나는 시간이 지 날수록 더욱 힘이 강해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수록 듣는 이들은 나를 더욱 믿게 되니까. 나한테 걸린 희생자는 절망적이야. 이름도 얼굴도 없는 내가 한번 찍은 사람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거든.  나를 추적한 다구?  어림없는 일이지.  나는 추적을 당할수록 더 교묘해지거든.  나는 어느 누구의 친구도 아니야.   내 임무는 그저 누군가에 대해 흠집 을 내는 것뿐. 일단 내게 걸려든 사람은 전과 같을 수 없지.  난 정부도 무너뜨리고 행복 했던 결혼 생활도 파괴시키지.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쌓아온 경력과 신뢰도 한 번에 헛된 것으로 만들고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게 하지. 골치가 아프고 소화도 안 될 거야 . 착한 사람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게 만드는 게 바로 나라니까! 나는 큰소리로 말할 필요도 없 어. 오히려 소곤소곤 귓속말로 퍼져 나가지. 그래서 내 이름은 소문이야”(애틀랜타 저널).

 

그러면 우리는 오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23-2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 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 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이 제안한 오해를 푸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수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터무니없는 소문을 바 울 자신의 행동으로 잠재워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유상섭). 구제척인 제안은 서약한 네 사람의 나실 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결례 의식을 행하고 그들이 삭발할 수 있도록 비용 을 대주는 것입니다(23-24절). 사실 유대인들의 눈에는 가난한 나실 인들을 대신해서 이러한 경비를 부담하는 행위는 극히 경건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와 예루살 렘 교회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경 고린도 전서 9장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요 ….” 바울은 자유자였지만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이 방법이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생긴 오해를 풀게 되었습니까? 그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오히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 갔습니다(30절). 그러면 우리는 오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다기보다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는 오해를 풀지는 못했지만 그 오해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행22장). 이 말은 우리가 오해를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또한 그 오해를 풀려고 노력함에도 풀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을 선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한번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는데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려 들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플라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왜 변명을 안 하십 니까?" 그 때 플라톤 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그들의 비난을 종결시키는 것은 나의 변명이 아니다. 그들의 비난을 침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올 바른 행위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간혹 오해로 인해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풀려 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고 도리어 실이 꼬이 듯이 더 오해가 깊어질 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 님의 때를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먼 저 가서 우리 앞에 놓인 문제 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인내하시면서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셨던 것입니 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인터넷).

 

 

 

오해가 아닌 이해를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부정적인 생각과 헛된 소문을 경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