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모범을 보여라!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 묵상]

 

 

아지스 페르난도는”예수님이 이끄시는 사역”에서 바라보기, 닮아 가기, 보여 주기” 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나이든 복음 전도자 새뮤 얼 멘디스와 함께 스리랑카의 몇몇 마을을 돌아다니며 전도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한번은 학교 교실에서 하룻밤 을 보낸 적이 있었다.  우리는 두세 개의 나무 의자를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이 른 새벽에 눈을 떠 보니, 그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의 모습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지도자는 사람들 앞에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나 도 어렸을 때 장로님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다.   또한 부모도 자녀에게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인터넷).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뒤돌아 볼 때에 어느 누구의 어떠한 모범된 신앙생활 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쳤습니까 혹은 끼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나 신앙 의 후배들에게 여러분의 무엇을 본받으라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하면서 자기의 모범을 본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한두 가지로 바울의 모범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약한 사람들을 돕는데 수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 장로가 범할 수 있는 5가지 죄가 있습니다:

 

  • 첫째 죄는 무관심(carelessness)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목회 모범은 일깨는 것은 양 떼를 해롭게 할 무엇이 생기지 않는가 하여 파수함입니다. 그의 목회 모범은 밤낮 쉬지 않음은 참 목자의 근면입니다.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함은 참 목자로서 가져야 할 사 랑입니다(박윤선).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무관심의 죄를 범치 않도록 깨어서 자 기를 본받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약한 에베소 교회 양떼들을 관심을 갖고 깨어 서 각 사람을 훈계하였던 바울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장로들로서의 영적 책임을 심각하게 받 아들일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 둘째 죄는 “얕음”(shallowness)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2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 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능히 든든히 세울 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 하 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든든히 세워져 있기를 부탁하였습니다(32절). 그러나 장로들이 그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든든히 세움을 받지 못하면서 교회를 세우고자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깊지 못하고 얕으므로 말미암아 교회가 든든히 세 워지지 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든든히 세 우시므로 교회를 든든히 세우신다 사실을 말입니다. 특히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든 든히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결코 든든히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 셋 번째 죄는 “탐심”(covetousness)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3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탐심이란 탕진하고 싶은 욕망으로 지배를 받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을 원하며 또한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원하는 욕망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섬기면서 아무 것도 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에베소 교회 안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알았고(30절) 또한 그들이 은, 금, 의복 같은 것을 탐할 줄 알았기에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기의 본을 본받기를 권면했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 “내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어길 때에 다른 9개 계명도 범하는 것이 됩니다. 탐심 하는 자는 훔치고 거짓말하며 살인하며 또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까지도 탐심의 욕 망을 채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하는 것입니다(엡5:5; 골3:5)

 

  • 네 번째 죄는 “게으름”(laziness)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4절을 보십시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 의 쓰는 것을 당하여.”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물질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천막 만드는 자로서 스스로 돈을 벌어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의 동역 자 들의 필요를 자기 손으로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만큼 부지런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 마지막 다섯째 장로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는 “이기주의”(selfishness)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바울은 장로들로서 교회 안에 약한 자를 돕는 것 이 마땅한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무를 망각하고 자기 배만 부르게 하지 말 것을 권면하 고 있습니다.

 

바울의 모범은 약한 자들을 돕는데 수고한 것입니다. 그는 장로들이 범할 수 있는 5가지 죄를 짓지 않았음을 3“너희 아는 바”라고 말하였습니다(34절). 즉, 그의 설교를 듣 고 있는 에베소 장로들이 바울이 모든 면으로 본을 보인 것을 친히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 다. 그래서 34절을 다시 번역한다면 “나의 필요한 것들과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을 이 손들이 섬겼다는 것을 너희들은 친히 안다”입니다(유상섭). 즉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고 말씀에 견고히 서서 형제들을 돌봄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고 아무 것도 탐하 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필요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필요도 채워주는데 힘을 썼습니다.

 

우리는 약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 또한 성경 로마서 14 장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바울의 모범은 관심의 눈물을 보였으며(31절),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견곤이 세웠으며(32 절), 탐심을 버렸으며 (33절), 부지런하였으며(34절), 그리고 이타주의 삶을 살았습니다(35 절).

 

둘째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십시오: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두 가지 위험이 있었습니다:

 

  • 첫째 위험은, “흉악한 이리”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9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 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 첫 번째 위험은 교회 밖에서 다가온 위험이었습니다. 여기서 “흉악한 이리”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염두해 두고 하는 말인지 바울은 밝히지 않지 만, 아마도 교회를 해하는 불신 유대인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암시했을 가능성이 있습 니다(유상섭). 그는 자기가 “떠난 후”, 즉 자기가 죽은 후에 교회 밖에서 “흉악한 이리”들 이 양의 옷을 입고(양 같이 유순한 태도로) 교회 안으로 침투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바울 의 예언임). 그는 이들에게는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 론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하겠지만 결국 그들은 삯군들로서 양 떼들에게 무관심할 것입니 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기독 신자들을 끝까지 대적하며 해칠 것임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둘째 위험은, 양 떼들 가운데서 일어날 거짓 스승들 혹은 이단자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0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여기서 “너희 중”이란 말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 가운데서도 어그러진 가르침을 가르칠 자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입니 다(유상섭).   이러한 바울의 고별 설교를 듣고 있었던 에베소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 니다.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세운 장로들 가운데 이단적인 가르침을 가르칠 사람 들이 등장할 것이란 말 이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장로들은 가운데서 일어날 이단자들 은 어그러진 가르침을 교인들에게 제시하여 자기들을 추종하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바울이 3년 동안 가르친 믿음의 도(주님의 말씀)에서 떠 나게 하는 가르침들을 떠나게 하는 이단적 가르침을 가르치는 장로들도 에베소 교회 안에서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였습니다(30절).   그 이단자들의 목표는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이탈하여 자기들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책은 무엇이었습니까?

 

  • 첫째로, 교회 지도자인 장로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므로 깨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대책은 지난 3년간 눈물로 각 사람을 가르친 교훈을 기억하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인 장로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야기될 때 하나님의 양 떼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 둘째로, 교회 지도자인 장로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움을 받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 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는 혹은 그의 은 혜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을 뜻합니다. 믿는 자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 은혜의 말씀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충분히 세워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거룩함을 받은 성도 들과 함께 종말론적인 기업에 참여할 수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이 말씀을 굳게 잡고 나간다면 믿음의 정도를 떠나 그릇된 길로 이끄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안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사 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가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 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 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이상했으나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 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습니다.   " 얘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 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 희생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교육이란 끝없이 지속되는 희생의 과정입니다(인터넷).

 

 

 

약한 사람을 돕는데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견고히 서 있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