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

 

 

 

[사도행전 17장 16-21절 말씀 묵상]

 

 

요즘 여러분이 사신 물건들 중에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새로 구입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새 차도 구입하고 싶을 수도 있고 새 집도 마 련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가장 보편적으로 젊은이들이 새로 구입하였던지 혹은 구입 하고 싶은 것은 ‘핸드폰’이나 ‘컴퓨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르신들은 무엇을 새로 구입 하고 싶으십니까? “폴 스미스의 '마케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보면 신제품이나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할 때, 타깃 고객을 제대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고객은 '새로 운 것'에 대한 수용태도에 따라 다것 그룹으로 나눠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노베이터', ' 얼리 어답터', '초기대중', '후기대중', '저항그룹'.   이노베이터는 '새로운 것'을 먼저 사용하 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소비자 그룹으로 전체의 2.5% 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얼리 어 답터는 이노베이터들이 새로운 것을 즐기는 것을 보고 구매하는 사람들로, 전체 고객의 13.5% 정도가 이에 해당됩니다. 마케팅에서의 '오피니언 리더' 격인 이들은 신제품의 성공 에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합니다. 이노베이터와 얼리 어답터가 '새로운 것'에 대한 모 험을 끝내면 대중이 드디어 구매를 시작합니다. 대다수의 고객을 차지하는 이들은 각각 34% 정도를 차지하는 '초기대중'과 '후기대중'으로 나뉩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것에 대해 ‘저항감'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저항그룹). 16% 정도가 여기에 해당됩니 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새로운 것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예 를 들어 과학이 발단해 가면서 새로운 핸드폰들과 컴퓨터들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것들을 계속 사고 구매하고 싶은 충동이 더욱더 자극을 받고 있 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며 “새것 집착 증후군”이라고 한다고 합니다(인터 넷). 즉, 새것이 옛 것보다 (항상)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17장16-2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베뢰아에서 피신하여 간 아 덴이란 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장 새로 되는 것”(something new)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21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덴 사 람들은 새로운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새로운 신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 아 덴 사람들은 이렇게 새로운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새로운 신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에게 지식에 대한 욕심(지식욕)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덴이란 곳은 우상으로 온통 가득 찼었던 도시였습니다. 바울 당시 아덴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에는 수없 이 많은 웅장한 신전들과 신들에게 받치는 제단이 있었습니다(유상섭). 로마 황제 숭배의 일환으로 로마 황제 아우그스투스에게 바쳐진 신전, 황제의 가족들에게 바쳐진 신선, 만 신 전, 여신 아테나 신전, 에메테르 신선, 제우스 신전, 아레스 신전, 아폴로 신전, 그리고 12 신들의 신전 등이 즐비하게 늘어있었고, 도시 각처에는 신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새겨진 제단뿐만 아니라, 또는 신에게 받치는 제단도 있었습니다(유상섭).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였습니다(16절). 이 분노는 소위 말하는 의분 이였습 니다. 이 바울의 분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심령으로 노여워하는 분노입니다(유상섭). 그래서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였고 도시의 광장(“저자”)에서는 모인 사람들과 날마다 논쟁을 벌였습니다 (17절). 아마도 유대인 회당에서는 안식일을 중심으로 바울의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 이고, 도시의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매일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17절, 유상 섭). 그 때 사도 바울이 논쟁을 벌인 사람들 중에 철학자들도 있었는데 그 철학자들은 두 다른 학파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에피쿠로스(Epicurean philosophers) 학파 와 스토아(Stoic philosophers) 학파 철학자들이였습니다. 아무래도 아덴은 척할 자들의 도 시였기 때문에 이들이 바울의 설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습니다(유상섭).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은 “쾌락”을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학파로서 쾌락 중에서 가 장 값진 것은 고통, 성가시게 하는 열정, 죽음으로 부터 자유로운 평온이리 삶입니다. 이들 에게 있어서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는 필수 조건은 신들과 사망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 입니다(유상섭). 스토아학파가 쾌락과 고통은 인간의 행복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 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가르친 반면에 스토아학파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두 학파 철학자들은 바울 도시 광장에서 복음을 증거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증거할 때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 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을 가리켜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반응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하였습니다(18절). 여기서 “말 장이”(idle babbler)란 말은 “씨를 줍는 자”란 뜻으로 “새가 씨를 찍어 먹듯이 잡다한 정보 를 모으는 자”를 가리킵니다(유상섭). 즉, 어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말씀을 그저 하나의 잡다한 정보로서 주목할 가치가 전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가리켜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고 생각하였는데 여기서 이 방 신들이란 새로운 혹은 익숙하지 않은 귀신들이란 의미입니다(유상섭). 즉, 이들은 바울 이 전하고 있었던 예수님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귀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을 붙들어 가지고 그 당시 도시의 주요 사법 기구로서 종교와 교육에 있어서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아레오바고”라는 시의 공식적인 의결 기구에 가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새교”(this new teaching)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19절).  오늘 본문 20절 을 보십시오: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덴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가리켜 “이상한 것”들이라고 여 겼던 것은 종교성과 새로운 것들에 무지 관심이 많았던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신은 많은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들이 지금가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신이였기 때문입 니다(유상섭). 아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이 전파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낯선 이 새로운 가르침을 그들을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 때 놀라운 반응은 아덴의 모든 시민들과 그곳에 거하는 외국인들이 바울의 증거하는 새로운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의 가르침)에 대해 말하거나 듣는 것 외에는 시간을 달리 보내지 않았습니다(21절). 즉 도시 전체가 한동안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을 듣는 일에 전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 후에는 강의를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는 일에 시간을 보냈습니다(유상섭). 아덴의 모든 시민들과 그곳에 거하는 외국인들이 이렇게 바울의 증거하는 새로운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 외에 시간을 달리 보내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자 그랬다기보다 바울이 전하는 새로 운 가르침을 알고자 하는 지식욕 때문 이였습니다(박윤선).

 

우리의 삶 속에는 실로 다양한 차원의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재물 욕, 권력욕, 애 정욕, 명예욕, 지식욕, 창작욕 등의 다양한 욕망이 있습니다. 근래에는 인간 의 욕망을 5단계로 구분합니다: (1) 생리적 욕망: 자기 생명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식욕, 성욕, 수면욕 등, (2) 소유욕: 재물 욕, 지배욕, 권력욕 등, (3) 인정 욕: 애정 욕, 과시욕, 명예욕 등, (4) 자아실현 욕: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욕망이나 사회적 가치 를 실현하려는 욕망의 단계, (5) 그 다음이 고차원적 욕망인 자기 초월 욕으로 구분합니다. 지식욕은 바로 네 번째 단계인 “자아실현 욕”에 속해있습니다. 바로 아덴 사람들에게 있었 던 이 지식욕은 그들 스스로 새로운 것을 알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강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 키기 위해서는 아덴 사람들은 자신의 저급한 욕망들인 재물 욕이나 권력욕 또는 명예욕 등 을 뿌리쳐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물 욕이나 권력욕이나 명예욕 등을 추구하면서 동 시에 삶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종교다원주의 세상에 살아가는 저 와 여러분은 아덴 사람들처럼 새로운 종교나 새로운 신들 또한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혹될 위험이 많습니다. 다 그럴싸하게 보이고 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여러 종교들, 또한 그들의 가르침, 등등 이 모든 것에 우리는 견고히 서있지 못하면 아예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어떻게 해서는 우리 믿는 자들을 유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고자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서 제일 지혜로웠던 왕인 솔로몬 왕의 전도서 1장16-18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마 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 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 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 니라.”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조차도 결국 지식을 많이 만나보았고 또한 계 속 추구도 해보았지만 결론은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욕을 절제하 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저 이 종교 저 종교, 이 가르침 저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그 종교 가 가르치는 새로운 지식을 추구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종교다원 주의 세상에서 우리는 결국 종교혼합주의에 빠져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잃어버리게 될 수 도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 이 유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빌3:8). 우리 는 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호6:3).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 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엡4:13).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나 자신을 알아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