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부심

 

 

 

[사도행전 16장 35-40절 말씀 묵상]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 다. 자기를 비하하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은혜를 받거나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은 무서 운 파멸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결과 중 하나는 자아학대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거 울을 볼 때마다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녀석아, 이 죄인아, 이 더러운 녀석아, 너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자격이 없어"라고 자학할 정도로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싸여 자존심을 상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등감이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적 의미로 열등감은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무가치하게 낮추어 평가하는 생각"을 뜻합니다. 중국어로도 열등감은 "스스 로 비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마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결국 열등이란 나 자신의 체 격, 용모, 능력, 학벌 등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비하시키며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입니다.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은 건전하지 못한 자아개념으로 인하여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열등의식에 사 로잡히게 되면 소극적이 되고, 만사에 자신이 없어지며, 이 감정 때문에 아무 것도 적극적 으로 하지 못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에 빠지는 사람은 자기의 부족한 면만을 확대 해 석하여 늘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영문학자며 철학자인 루이스(C.S.Lewis)는 사단이 현대인들의 인격과 의식을 파괴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비교의식"인데 이는 열등감의 배 후세력이라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사단의 무기에 공격을 당해 열등감을 가지고 소극적인 삶, 만사에 자신이 없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 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움이 있으며 또한 자기 학대에 시달리 고 있습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는 때때로 열등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데 서 오는 완벽 주의적 증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열등을 느끼는 부분 을 덮고 위장하고자 아주 철저하게 애쓰는 경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부심이란 무엇입니까? 자부심이란 자기존재 가치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J. 하드필드 박사가 자신감에 대하여 연구 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넌 틀렸어. 이젠 끝났어!"라고 자괴감을 줄 때 우리는 실제 가진 능력의 30%도 채 발휘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하는데 왜 니가 못해!"라고 자신감을 줄 때, 우리는 무려 능력 의 500%까지 발휘할 수 있고 합니다(인터넷).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 밖에서 뭔가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들을 우리 안에서 찾 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우리는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영원한 자부심과 무한한 존귀성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그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3장을 보면 하 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얼마가 귀한지 더욱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묵상했지만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다시피 해서 감옥에 들 어가 있었을 때에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에(25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곳에 남아있으므로 결국 간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 으므로 크게 기뻐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34절). 그런 후 날이 새매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 려고 상관들이 아전(법집행관)들을 보내었고 그들은 간수를 통하여 바울과 실라에게 “상관 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고 말을 전했습니 다(35-36절). 그 때 바울의 답변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 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37절). 이 얼마나 담대한 바울의 태도입니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자기 자신과 실라가 로 마 사람임을 밝힌 것입니다. 분명히 귀신들린 여종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한 후 그 여종의 주인들이 돈을 더 이상 벌 수 없음을 보고(19절)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 (market)로 관원들에게 끌어가서 상관들 앞에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하였을 때 (20-21절) 바울은 자기가 로마 사람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서야 자기와 실라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로마법대로 타당한 재판 절차를 받지 못 하고 감옥에 집어 넣었으니(유상섭) 그 상관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라고 담대히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왜 바울이 지금에서야 자기와 실라가 로마 사람임을 밝 히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바울이 상관들에게 자기와 실라가 잡혀서 상관들 앞에 있었을 때 자기들이 로마 사람임을 밝혔다면 그리 많이 매 맞고 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그는 로마 사람임을 밝히지 않고 다 고통을 당한 후 지금에 와서야 자신들이 로마 사람임을 밝히는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 명한 사실은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이 로마 사람임을 밝히지 않았기에 결국 간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34절). 만일 그들이 치유 받은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이 송사할 때 로마 사람이라고 밝혔다면 감옥에도 갇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감옥 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기도의 능력도 체엄하지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간수하고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기에 그 간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성경 기록 같은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34절).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기도의 사람들인 사 도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이뤄진 것을 묵상할 때 바울과 실라의 자세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행5:41). 바울은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상황에서 자기와 실라가 로마 사람임을 밝 혔을 때 오늘 본문 38절을 보면 아전(법집행관)들이 상관들에게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임 을 고했을 때 그 상관들은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은 그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비 시민권 자들에 비하여 아주 공정하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재판을 받게 되어있는데 그러한 공정하고 정당한 절차가 없이 로마 사람인 바 울과 실라를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로 매라 치라”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었으니 (22-23절) 이러한 사실이 로마 당국에 보고되면 그 상관들 (아미 치안 판사들)은 책임을 면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친히 감옥으로 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바울과 실라를 인솔하여 나 와서는 도시를 떠나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39절).   얼마나 당당하게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감옥을 떠나고 있습니까? 자기의 권리를 찾아 로마 사람의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볼 때에 바울과 실라는 로마 사람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들 할지 모르지만 오래 전에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희망사항 이 아니 였는가 생각됩니다. 시민권만은 못하더라도 일단 미국 영주권이라도 취득하게 되 면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보통 이민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마 1995년도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에 나아갔었을 때 비자를 받고 나아가지 않아서 일본 후쿠오카 한국 대사관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부산에 살 고 있었던 사촌 동생하고 갔었는데 일본 비행장에 내려서 입국하려고 했을 때인가 사촌 동 생이란 저랑 다 무엇인가를 써서 냈는데 저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그 일하는 사람이 직접 고 쳐주고 들어가라고 한 반면에 제 사촌동생은 한국 시민권자이기에 저기 가서 고쳐 오라고 다시 돌려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사촌동생은 기분이 매우 나빴었습니다. 그 때 미국 시민권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작은 제 자신의 삶 속에서 겪었던 예이지만 미국 시민권이라는 것은 이렇게 편안 면이 있습니다.   결국 미국 시민권자 로서 자기의 권리를 누리다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어쩌면 자부심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 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은 미국이나 한국이 아 닌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3장 20-21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의 시민 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 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천국 시민권을 가진 저와 여러분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천국 백성들입니다. 그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 님의 경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결코 열등감이나 좌절감을 가지고 자아학대하며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아니 될 것 입니다. 또한 우리는 결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계3:16) 물질적 부요함과 세속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속적 자부심은 결국 영적 궁핍함의 원인 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속적으로는 궁핍한 가운데서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저 천성 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내게 능력주 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자부심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 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 시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떳떳하게 주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면서 불안해하면서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 이사야 41장 10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 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자존감이 낮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 안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