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

 

 

 

[사도행전 16장 6-10절 말씀 묵상]

 

 

“한국 해외선교 방식 변화의 기로에”란 제목 아래 인터넷 기사를 보았습니다. 샘 물교회 봉사단의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해외선교 방식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미 시사주간 타임이 7월27일 보도했습니다. 그 보도 내용 중 한국의 선교현황도 자세히 보도했는데 그 기사를 보면 지난해 기준으로 전 세계 150여개국에 선교사 1만6000 명을 파견, 미국에 이은 제2의 선교대국으로 설명했습니다. 선교사는 중국에 가장 많이 파 견돼 있고 러시아, 유럽, 동남아시아 순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견했으며 선교가 금지된 중국 은 선교사들이 연구원, 사업가 등으로 가장해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전도에 대한 열기가 교회간 지나친 경쟁을 유발시키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타임은 지적했 다. 외국에 가능하면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좀더 위험한 지 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또 경쟁이 심해지면 선교에 대한 성과주의 가 나타난다고 우려했다. 봉사나 선교 자체보다는 해외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보여주는 업 적위주의 선교가 퍼질 수 있다는 얘기다”(인터넷). 샘물교회 봉사단의 아프가니스탄 선교 사역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말하기보다 참으로 귀한 선교 사역이요 그 사역자들은 참으로 보배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 기독교 신문에서 몇 몇 목사님이 글에서 제안한 것처럼 지금을 말할 때가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 도할 때라는 생각입니다. 기도하되 우리는 세계 방방곡곡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님들과 그들의 가정과 사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8월달 구역성경공부(“세계 비젼”)를 위하여 구역장 성경공부 때에도 구역장 분들과 함께 나누고 도전하였던 것은 우리 의 기도 영역을 점진적으로 넓히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정도 선교 지요, 우리 친척도 선교지요, 우리 직장, 회사도 선교지요, 우리 이웃도 선교지요, 우리 고국이나 살고 있는 미 국도 선교지요, 우리 교회에서 후원하는 선교사님들이 있는 나라도 우리 선교지요, 등등 … 우리는 이 선교 지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16장6-10절 말씀 중심으로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 교 사역”이란 제목아래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 사역은 어떠한 것인지 한두 가지로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은 성령님께서 막으실 때에 중 단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6-7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 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은 그의 동역 자 실라와 함께 제2차 선교 여행 중 루스드라 라는 지역에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예 수님의 제자 디모데를 만나(1-3절)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이방인 형제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므로(4절)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 고 수가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5절).   그런 후 오늘 본문 6절에 와서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선교사역을 감당하고자 아시아로 향하려고 하였지만 성령님께서 아시 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새로운 선교 지를 찾아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돌아다니다가(6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 로 가고자 애썼습니다(7절).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 을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7절).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시아나 비두니아에서 전하고자 애썼는데 성령님께서 전하게 못 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히 바울과 그의 일행은 올바 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성령님께서 막으셨는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아니, 어떻 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막으셨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우선순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는 바 울과 그의 일행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막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나 비두니아에 서 전하는 것보다 먼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이미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다른 곳이란 바로 마게도냐입니다(10절).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실 리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관점 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지역의 우선순위가 그의 섭리 가운데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는 좋은 의도(motive)도 있지만 무엇이 먼저 있고 무엇 이 그 다음인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할 때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혼동할 때가 많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찾고자 고민하여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명심해 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우선순위와 맞춰져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 울과 그의 일행을 향하신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아시아나 비두니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의 우선순위를 바로 마게도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몰랐던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선교 지를 찾아 열심히 나섰지만 아시아나 비두니아 모두 성령님께서 막으셨던 (허락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아시아니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에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성령님께서 막으셨을 때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그 성령 님의 막으심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성령님께서 우리 로 하여금 정지케 하실 때 우리는 브레이크(Break)를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님께서 “멈추라”하면 우리는 “예”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왠지 우리는 마치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너무 깊게 밟아 속도를 너무 빨리 내느라 브레이크 페 달을 갑자기 잘 밟지 못할 때가 있는 것처럼 주님의 일을 열심히하는 라 성령님께서 ‘멈추 라’고 막을 실 때에 우리의 영적 브레이크 페달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멈춰야 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앞을 보고 달리기에만 바빠서 멈춰 야 할 때를 분멸 못하고 무심코 달려서는 아니 됩니다. 성령님이 달리라 하면 달리지만 성 령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면 멈춰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영적 민감함 (spiritual sensitivity)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항상 민감해 있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 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령님은 주님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흐지부지하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성령님이 아니십니다. 흑백이 분명 하게(clearly) 하시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님의 막으심(허락지 않으심)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인드(mind)를 날카롭게(sharpened)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가 있습니 다.

 

둘째로,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선교사역은 성령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때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 이러라.”   성령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으로 하여금 아시아나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막으시므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관문인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8절). 거기서 거하고 있었을 때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는데 그 환상에서 마게도냐 사 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 이고 (“인정”하고) 환상을 본 후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10절). 우리 성령님 은 우리가 가고자 애썼던 문을 막으셨을 때에는 꼭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고자 애썼던 문은 바로 아시아(Asia)와 비두니아였지만 성령님께서 그 문을 막으셨지만 결국 환상을 통해서 그들을 마게도냐, 즉 유럽(Europe)로 가는 문을 열 어주시고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환상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는 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환상으로 우리에 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환상은 보이는 형상이 그 중점으로 생각되는 계시입니다(박윤선).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님께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바 울 시대와 달리 환상을 통하여서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뜻을 알려주신다고 믿습 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심령에게 주님의 뜻 이 무엇인지 계시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한 가지 오늘 본문에서 생각하며 고민하는 부분은 “인정함 이러라”는 단어입니다 (10절). 영어 NIV나 NASB 성경을 보면 “conclud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과 그의 일행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들을 부르신 줄을 “결론”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s라는 주석에 의하면 ‘인정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함께 가도록 만들다’, ‘하나로 되다’, ‘결합시키다’, ‘이것저것에 동의하므로 결론을 내리다’ 입니다(to make go together, to coalesce or knit together, to make this and that agree and so to conclude)(주석).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에 바울과 그의 일행은 바울 의 환상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이성(reason)을 사용하여 논한 결 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함께 동의하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칼빈의 말을 빌리자면 바울과 그의 일행은 환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그의 뜻을 계시해 주셨음에 충분히 설득을 당했다(being fully persuaded)는 것입니다(칼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분별함 에 있어서 제일 먼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 다(롬12:2). 그러므로 영적 민감한 가운데서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과 열어주시는 문을 분간해야 합니다. 그는 분명히 한 쪽 문을 닫으시며 또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 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점은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져가는 이성을 사용하여 함께 동의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에 평강과 믿음과 담대함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이끌림을 받아 선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가 영적으로 민 감하여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과 열어주시는 문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막으 신다는 결론이 내려질 때에 성령님께서 그럼 다른 문을 열어주실 것은 믿고 기도하면서 새 로운 선교지를 찾아 애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때에 성령님께서는 그의 방법으로 새로운 선교 사역지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선교 사역을 묵묵히 신실하게 감당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