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 (2)

 

 

 

[사도행전 16장 1-5절 말씀 묵상]

 

 

크리스찬 투데이 신문(2007년7월25일)에 미로슬로브 볼프(예일대학교 헨리 B. 라 이트 석좌교수 • 신학) “특집/ 남들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라는 제목 아래 실려 있는 기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복 합적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종이나 문화나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 배타적이면 긴장관계 를 자아내므로 그저 남남으로 살면서 갈등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 에서 “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자는 한 4가지로 제 안하였습니다(크리스찬 투데이):

 

  • 첫째로, “서로를 포용하려는 의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남들을 나의 축소 요인으로 생각하기보다 나를 풍요롭게 해줄 잠재력으로 상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 둘째로, “입장 바꿔 보기.” 서로 포용하려는 의지를 실천하며 살기 위해선 관 점의 역전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남들을 볼 때 그들 자신의 관점으로 볼 필 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남들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째로, “상호 개입.” “상대가 어떻게 이해되기를 바라는지 또 상대가 나를 어 떻게 이해하는지를 내가 이해하나서는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서로 합의해야 할지, 그냥 불일치로 남아있을지 판단해야 한다. 여기가 바로 토의적 상호개입이 필요한 부분이다.”

 

  • 마지막 넷째로, “남을 포용하기.” 기독교인들은 순수 혈통이나 국적, 문화, 종 족을 초월하여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저희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인종적으로나 문 화적으로 다른 세 사역(한국어, 영어, 히스패닉)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주님 안에서 통일성 을 지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 생각이 됩니다.  세 사역 식구들이 서로 포용하려 는 의지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노력을 더욱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입니 다.  또한 다 완전히 우리가 일치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면서 상 호 개입의 필요성을 무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젠 더 이상 “남” 이 아니라 “서로”라는 개념아래 서로를 포용하며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아가는데 준비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16장1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 교회가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 할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 고 예수님의 제자는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딤후1:5), 즉, 신실한 믿음, 위선이 없 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예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 네 가지로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시간을 가졌었 습니다: (1) 첫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였습니다 (롬 4:18). (2) 둘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연약해 지지 않는 믿음 이였습 니다(19절). (3) 셋째로, 그의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 이였습니다(20절).   (4) 마지막 넷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 님의 약속의 말씀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 이였습니다(21절).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 교회가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은 두 가지를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가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 리 모두가 칭찬 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2절을 보십시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 디모 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 즉, ‘기독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던 자 였습니다. 어떻게 디모데는 그 두 지역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을 그의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참된 제자 도를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예수님의 제자였기에 주위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 이미 전에 묵상하였지만 예수님 당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님과 함께 행하 면서 배우고 순종하며 주님을 본받아 사는 것을 의미했는데 디모데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 님과 함께 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신앙과 행위 속에 거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으로서, 체계적 이고 점진적으로 자기가하는 모든 일을 그러한 목적에 맞추어 나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기독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칭 찬받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무에게나 칭찬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디모데처럼 진실한 신자들에게는 칭찬을 받을지라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 다. 누구든지 마귀의 무리에게 칭찬을 받을 때엔 그 자신이 마귀가 되어가는 줄 알고 자신 을 경계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그 칭찬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 영광을 받지 않아야 됩니다(박윤선).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 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잠27:21).

 

디모데처럼 칭찬 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밖 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칭찬 받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처 럼 “그리스도인의 교회”입니다(11:26).  바나바는  사울(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1년 간 모여 있는 큰 무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제자 훈련을 철저히 시켰을 때(26절, 유상 섭) 그 결과 안디옥 교회 제자들은 질적으로 놀라운 성숙에 도달하므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비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제자 훈련을 잘 받아 예수 그리스도 를 잘 좇았으면 주위 비 기독교인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다’라고 칭함 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되길 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을 자랑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아마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교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되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것은 교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 교회 회중들의 낮은 영적 수준의 이유가 된다”(인터 넷). 우리는 결코 낮은 영적 수준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성경 고린도전 서11장1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러 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권면할 수 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 교회가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 4절을 보십시오: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 고니온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예수님의 제자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의 선교 사역에 동 참시키고자 하였을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리고 가 할례를 행하였습니 다(3절). 그 이유는 디모데의 아버지가 이방인 이였기 때문에 디모데가 유대인들처럼 할례 를 받지 않은 것이 유대인 선교 사역에 방해(문제)가 될 것으로 바울은 판단하였기 때문입 니다(3절)(유상섭).   이것은 결코 바울이 사도행전15장에 나오는 율법주의 적이며 바리새파 적인 믿는 유대인들의 주장인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방편으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할례를 베푼 이유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을 고려해서 행한 것뿐입니다(유상섭). 여기 서 우리는 바울의 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그는 사람들 구원코자 하였습니다(고전9:22).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사람을 얻고자 하였습니다(19절).   유대인에게는 바울은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20절)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였지만 율법 없 는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하였 습니다 (23절). 그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후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여러 성을 돌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내린 결정을 준수하도록 권면했습니다(4절). 그 결정 은 이미 우리가 묵상한 사도행전15장20절과 29절에 나와 있는 이방인 성도들이 지켜야 할 규례였습니다. 그 규례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29절). 제1차 선교 지를 두루 다니면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이 규례를 그 지역 이방인 성도들 에게 주어 지키게 한 이유는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 사이의 화목 때문 이였습니다 (박윤선). 아마도 그 당시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이 재방문하였던 1차 선교지 교회들 안에 서 다수의 이방인 신자들과 소수의 유대인 신자들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유상섭). 그 러기에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교회의 다수인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소수의 유대인 신 자들을 배려해서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지키 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를 돌아 볼 때에 우리 다수의 한국어 사역 성도님들이 소수의 영어 사역 식구들과 히스패닉 사역 식구들을 배려하여 화목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배려할 때에 서로의 화목을 위하여 삼가야 할 것은 삼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사역 형 제, 자매들을 향하여 우리 한국어 사역이 삼가야 할 것은 그들을 어린아이들 취급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여러분의 자녀들이요 손자들이며 나이가 여러분들보다 훨씬 어리고 할 지라도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히스패닉 사역 형제, 자매들을 생각할 때 우리 한 국어 사역이 그들을 다 “Mexican”(멕시칸)이라고 부르면서 혹여나 남미 사람들을 향한 편 견이나 선입관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다 십자가 앞에서 내어 버린 후 그들을 주님의 순수한 사랑으로 포용해야 합니다. 우리 세 사역이 서로 화목하기 위해서 지켜 나아가야할 하나님 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교회 세 사역 식구들은 서로 사랑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에게 배우고 자하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하며 서로를 향하여 참고 인내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세워주 는데 노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목케 하는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 두가 다 ‘화목케 하는 자들’(peacemakers)이 되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화목을 지켜 나아가 는 자들’(peacekeepers)이 되야 합니다.

 

유명한 성경 교사이며 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섬김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느냐, 손가락 하나 로 오라 가라 할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로 기준을 삼는다.   또는 지적인 수준과 학문적인 탁 월함, 임원을 맡고 있는 모임이 몇 개인지를 따지기도 한다.   또 많은 이들은 은행 잔고와 자산과 물질적 소유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위대함을 가늠한다. 그러나 예수님 이 내리는 평가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주님의 평가 기준은 오직 한 가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 다. 그 속에 위대함이 있다"(인터넷).

 

 

 

주님께 칭찬 받길 간절히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이중계명을 지켜 행하는 자로 세움 받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