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사역

 

 

 

[사도행전 15장 35-41절 말씀 묵상]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갈등과 번뇌로 살아가는지 모릅 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연약한 자들이 많습니다(살전5:14).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이 연 약한 자를 위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살전5:14). 과연 우리는 마음이 연약한 자를 어 떻게 위로할 수가 있습니까? 로버트 스트랜드의 “위로의 영성”이란 책 머리말에서 헨리 나우웬은 “위로”란 말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 한다고 해서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함께 있어 주 는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15장 22-35절 말씀 중심으로 “위로의 편지”에 대해서 묵상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보낸 위로의 편지를 생각하면서 우 리 또한 위로의 편지를 쓰자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 사도행전15장 35-41절 말씀 중심으로 바울의 제2차 선교 사역을 묵상하면서 과연 위로의 사역을 저와 여 러분이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위로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재방문하는 것입니다(다시 가라!).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36절을 보십시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위로의 편지를 안디옥 교회에 전하는 유다와 실라와 함께(32절) 안 디옥으로 내려와서 거기서 거하면서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 파”하였습니다(35절). 그런 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났을 때 바울은 바나바더러 제1차 선교 지를 다시 방문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36절). 왜 바울은 제1차 선교 지를 바나바와 함께 다시 가려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형제들이 어떠한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제1차 선교 여행 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한 각 도시에 있는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제1차 선교지를 재방문하려고 했습니다. 이 것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재방문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선교지 재방문의 목적은 전도가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형제들의 양육이었 습니다(유상섭).

 

“양육”이란 무엇입니까? “양육이란 복음 전도에서 얻은 열매를 계속 보존하는 것 입니다. 즉 영적으로 어린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잘 시작하고 또 잘 성장하 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성경공부교재).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잘 시작하고 또한 잘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잘 시작하기 위해선 신앙의 기초가 견고해야 합 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에 대한 성경 말씀의 기초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은 단지 감정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느 끼는 것만으로 신뢰할 만한 확신을 가지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죄를 범하 던지 하면 죄책감 속에서 구원의 확신이 쉽게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잘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구원이 자신의 감정이나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 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해주셨고 약속해 주셨나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 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심은 나무에 물을 주듯이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이 잘 성장하 도록 돕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정에 이끌리기보 다 하나님의 말씀(사실)에 이끌림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 줘야 합니다. 제일 중 요한 양육의 원리는 바로 “모범”(example)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을 양육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원리는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부지런히 본받으 면서 그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줘야 합니다.

 

둘째로, 위로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화목하는 것입니다(다투지 말라!).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39 절을 보십시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 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제1차 선교 지를 다시 방문하자는 바울의 제안을 바나바는 받아들였지만 그 둘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마가라 하는 요 한”(37절)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의견을 달리하였었는데 바나바는 자 기의 사촌인 마가라 하는 요한도 제2차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가길 원하였던 반면에 바울은 전에 마가라 하는 요한이 제1차 선교 여행 도중에 밤빌리아에서 자신들을 떠나 선교 사역 을 돕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을 제2차 선교 여행에 데리고 나가는 것이 합당 치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38절). 그 결과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 게 된 것입니다(39절). 이들의 논쟁은 단지 말싸움이 아니라, 현격한 견해 차이에 근거한 심한 논쟁을 했던 것입니다(유상섭).

 

여러분의 생각에는 누구의 견해가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의 견해입니까? 아니면 바나바의 견해입니까? 바울의 견해는 마가라 하는 요한은 제1차 선교 여행 때 도 중에 사역을 완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자이기에 그를 제2차 선교 사역 보조자 로 데리고 가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고 바나바의 견해는 자기의 사촌 동생인 마가를 데리고 가자는 견해였습니다. 유상섭 교수님은 바나바의 견해보다 바울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으로 본문을 주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어는 한 사람의 견해 가 맞는다고 말하기보다 바울과 바나바의 견해가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지향이 그저 다를 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일-지향적 (task-oriented)인 반면에 바나바는 사람-지향적(people-oriented) 혹은 관계-지향적 (relationship-oriented)였다고 생각합니다. 일 지향적인 사람들은 먼저 일을 끝내길 원합니 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과 관련된 쟁점들(issues)를 처리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직장에 가서 일을 끝내는 사람들이요 그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하 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지향적인 사람들이 마음이 차가운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저 그들은 어쩔 때 그들의 우선순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사람-지향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일함에 있어서 기분이 좋아야지 아주 질적인 일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고 믿고 있습니다(인터넷).   바울과 바나바의 문제는 무엇 이였습니까?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 면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다툰 후 갈라셨다 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 에 대해 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제일 중요한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열심을 잘 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열심이 통솔되지 못할 정도로 탈선되면 안된 다”(칼빈, 박윤선). 참으로 공감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열심을 잘 조절 해야 합니다. 지나친 열심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나 선교지에서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바울과 바나바처럼 서로 지향이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하 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기질과 은사가 다르기에 중요한 것은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화목하여 함께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비록 바울과 바나바가 심각한 견해 차이로 다 투고 갈라서서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안디옥 교회 형제들에게 주님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선교지로 떠났고(40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부로로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갈라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사 결국 나중에는 바울은 바나바를 칭찬하였으면 또 한 마가 요한도 좋게 여기게 하셨습니다(골4:10).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하나님께 받은 자들입니다(고후5:18). 그러므로 우 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peace-makers)이 다 돼야지 화평을 깨는 자들(peace-breakers)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치 가정에서 화평을 깨는 부모가 된다면 그 부부의 자녀들은 위 로받기보다 상처를 받듯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화평을 깨는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 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로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화목하게 하는 자들이 돼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위에 형제, 자매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위로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굳게 하는 것입니다(교 회를 굳게 하라!).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41절을 보십시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 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 바울은 결국 바나바와 다툰 후 갈라서서 실라와 함께 제2차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실라란 인물은 이미 우리가 묵상하였듯이 그는 예루살렘 지도자 중 한 명으로서 유다란 인물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공문서(위로의 편지)를 받아 이방 인 안디옥 교회에 와서 그 편지를 읽은 후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31-32절)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안디옥 교회로 와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유 상섭).   실라는 바울에게 적합한 동역 자였습니다(멕아더).   그 이유는 실라는 선지자로서 (32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라는 유대인으로써 유대인들만 들어가는 회당에 들어갈 수 있었고 로마 시민권자로서(16:37) 바울처럼 동일한 유익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라는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존경을 받은 지도자로서 이방인의 구원이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는 바울의 가르침을 보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새로운 동역자인 실 라와 함께 안디옥을 떠나 제1차 선교 사역 지였던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며 교회 들을 굳게 하였습니다(41절). 교회들을 견고케 하는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14장22절에서 보았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 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또한 성경 사도행전15 장32절을 보면 실라도 바울처럼 형제들을 굳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 수 가 있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과연 우리 는 어떻게 주위 형제자매들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든든한 버팀목이란 마치 뿌리가 깊은 견고한 나무처럼 비바람이 몰아쳐도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어떠한 유혹과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라도 믿음 안에서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며 신앙 생활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우리 주위 형제자매들을 굳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 리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굳게 하기 위해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야 합 니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힘을 쓰도록 권면하 며 도와야 합니다(엡4:13).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 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14절).

 

우리가 이미 묵상한 사도행전 9장3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 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기서 “성령의 위로”라는 말씀은 성령의 특 성을 잘 보여줍니다. 성령을 뜻하는 헬라어 원어는 ‘파라클레테’입니다. 그 뜻은 ‘위로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위로의 영이라고 할 때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을까요? 그 내포된 뜻 중에 하나는 바로 성 령님은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언제 성령님의 위로하시는 사역이 가장 잘 드러 납니까? 이 성령의 사역이 가장 잘 나타나는 때는 고통과 시험의 시간에서입니다. 성령님 이 함께 하실 때 시험과 위로는 정비례합니다.  즉 시험이 큰 만큼 위로도 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고후 1:5).

 

 

 

성령님의 위로의 사역에 쓰임 받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은혜로 화평케 하는 사역과 견고케 하는 사역을 감당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