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인 짐을 지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 한 줄 알았노니"(사도행전 15장28절).

 

 

"교회가 교회답게"란 제목 아래 써진 서정운 목사님(장로회 신학대학교 명예총장)의 글을 보면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조직이나 건물이나 시설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와 왕으 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데로 말씀과 성령의 교훈과 인도를 따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예배, 기도, 전 도, 교육, 사귐(나눔)과 섬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아 닌 건물과 시설 등등에 생명을 걸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 또한 감당하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말씀과 성령의 교훈과 인도"를 따른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기에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종교적이며 습관적인 예배, 기도, 전도, 교육, 사귐(나 눔)과 섬김이 아닌가 냉적하게 생각해 봅니다.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까 생각해 볼 때에 서 목사님의 이 말씀이 아직도 마음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역사 속에서 가장 교회다웠던 교회들은 정치, 사회 및 종교적 이유로 교회의 비본질적인 것들을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교회들이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교회는 무엇이 본질적인 요소 이고 무엇이 비본질적인 '기타의 것들'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비본질적인 것에는 연 연해하지 않고 본질적인 것은 순교적 자세로 고수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교회답게 존재하고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인터넷).

 

저는 비본질적인 것에 생명을 거는 이유는 핍박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사탄 은 교회가 교회답지 않길 바라기에 교회의 본질을 공격합니다. 사탄의 악한 영들과 자식들 은 교회를 박해 혹은 핍박하므로 교회의 본질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박해가 없는 종 교적 자유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교회의 본질을 공격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박해가 없기에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사수하려는 열정이 식 어져 있기에 그냥 놓아두어도 교회의 비본질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쓸 줄 사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비 본질을 구분할 수 있는 능 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실로 말미암아 무분별한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 의 교회를 세상의 교회로 바꾸고 있지 않나 심히 염려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8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1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 터" 안디옥으로 내려와서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 성도들에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메지 못할 멍에(10 절), 즉 율법의 짐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10절)하는 것으로서 하나 님이 세우신 은혜의 구원 계획을 문제시하여 의심하는 죄입니다(박윤선). 오직 예수 그리 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능은 은혜보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겸손함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가치한 존재 임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는 교만함 가운데서 은혜보다 행위로 구원 받으려는 인간의 어리 석음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비본질적인 짐들을 지면 안 됩니까? 다시 말하면, 왜 우리는 율 법의 짐들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짐들 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마11:28).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불필요 한 무거운 짐들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기보다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 혹은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은 이러한 비본질적인 짐들을 지고 사는 자의 삶을 가리켜 괴로운 삶(행15:19)이며 또한 영 혼을 동요시키는 삶(24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 메지 못할 멍에인 율법의 짐들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 하니라"(11절).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은 혜로 비본질적인 짐인 율법의 짐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져야 할 본질적인 짐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 사 도행전 15장 20절과 29절을 보면 한 4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 이것들을 "스스로 삼가"하는 것이 바로 이방인 교인들이 져야할 본질적인 짐들입니다.   The Bible Exposition 주석을 보면 이 4가지를 두 종류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계명(Commands)와 (2) 양보(Concessions). 우 상숭배와 음란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멀리할 것을 명하고 있는 목록입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널리 펴져 있었던 이 두가지 범죄 행위(고전8-10장)를 안디옥 교인들 에게 멀리하며 삼갈 것을 편지로 명하였습니다. 이 두 항목에 대하여서는 유대인이나 이방 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안 되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보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의 관한 피와 고기를 먹고 마시는 것은 유대인들 의 관점에서는 불결한(unclean) 것이었기에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의 다른 점들 (differences)이 나뉨(division)을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뉘지 않고 교회의 일 치를 보여준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의 관점에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안 해도 된다는 쪽으로 주장하게 되었고 이방인들 관점에 서는 새로운 먹는 습관을 받아들여서 우상 제물의 고기와 피를 먹고 마시지 않기로 한 것입 니다(31절). 이것을 통하여 어떠한 열매를 맺었습니까?

 

  • 첫째로, 교회의 통일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율법 그룹과 은혜 그룹으로 둘로 나 눠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 둘째로, 양방의 양보적인 결정으로 교회는 잃어버린 유대인들에게 한 증인의 공동체로 본을 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신 주로 교회란 아직도 유대인들과 identified하였기에 유대인 전도에 있어서 유대교인들이 이방인 교인들과 같이 하나 됨을 나 타내다는 것은 증인의 공동체의 파워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 마지막 셋째로, 양방의 결정은 많은 이방인 교인들에게 축복을 가지고 왔습니다.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31절), 바울의 제2선교여행 떄 이 편지를 여러 교회에 가서 나눔으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므로 교회성장(16:5)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질적 인 짐을 질 때에 우리가 잘되고 마음이 평안함을 맛 볼 것입니다(29절).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비본질적인 멍에와 같은 짐들을 다 벗어 버리고 본질적인 짐 을 감사하므로 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요소와 비본질 요소들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율법의 짐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