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편지

 

 

 

[사도행전 15장 22-35절 말씀 묵상]

 

 

우리 모두는 위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는 인생들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어설픈 위로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인터넷): 못생긴 감이 있었습니다. 이 감은 마음이 착했지만 얼굴의 피부가 거칠어서 친구인 고구마가 항상 감자라고 놀렸습니다. 감은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서 나중에는 감자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감은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갔습니다. 감을 진찰하던 의사는 감에게 말했습니다. ‘감씨. 당신은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 렸어요. 그래서 이제 한번만 다른 이들이 당신을 감자라고 부르면 당신은 죽게 됩니다. 그러니 당분간 외출하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쉬세요.’ 감은 걱정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 습니다. 그 이야기는 친구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친한 친구인 고구마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감을 감자라고 부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감을 위로하기 위해서 감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감을 불렀습니다. "감!"  그 러나 감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감...감..!" 그러나 감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구마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감... 자냐?" 그래서 결국 감은 죽고 말았 습니다(인터넷). 저는 이 한 예화를 읽으면서 욥기 16장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거기 보면 욥은 자기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가리켜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도는 위로하려 한 것이지만 결국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지 못했습 니다. 아니, 오히려 욥을 더욱더 번뇌케 하였습니다.

 

로버트 스트랜드의 “위로의 영성”이란 책을 보면 헨리 나우웬의 머리말이 나옵니 다. 거기서 나우웬은 “위로”란 말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 습니다. “위로한다고 해서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5면). 과연 저와 여러분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5장 30절 하반 절에서 3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이 구절을 보면 “편 지”란 단어와 “그 위로의 말”이란 단어를 볼 때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보낸 편지는 ‘위로의 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위로의 편지”라는 설 교 제목 아래 이 편지에 대하여 한 4가지로 묵상해보면서 저와 여러분 또한 실제로 위로의 편지를 써서 우리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로하는 사랑의 불타는 위로자로 세움 받기를 기원합니다.

 

첫째로, 발신자

 

이 위로의 편지를 발신한 사람들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 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3절을 보십시오: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이 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올라온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들(2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과(4절) 또한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인 “이 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5절)는 말도 다 들은 후 “이 일을 의논하러 모 여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7절). 그런 후 그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이 결정하기를 야고보의 제안처럼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 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19-20절)을 좋게 여겨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갈 사람을 택하여 그 사람을 통하여 편지를 안디옥 교회 로 보내기로 가결한 것입니다(22절).

 

저는 이 위로의 편지의 발신자들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과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 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에 드는 생각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발신 자시라는 사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 보내시는 주님이 시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전달자

 

이 위로의 편지를 전달한 사람들은 바로 “유다와 실라”라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들 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2절을 보십시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 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 의 결정이 “온 교회”의 보고되어 최종 결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유상섭). 그런 후 온 교 회는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 교회에 그 결정 내용을 담은 공문서와 함께 파송 한 인물을 선정했는데 그 인물은 형제들 가운데 인정받은 지도자로 바사바란 별명을 가진 유다와 실라였습니다(유상섭).   이들은 오늘 본문 32절을 보면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이들은 안디옥으로 파송을 받아 결국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 하였습니다(30절).   그리고 그들은 “여러 말로 (이방)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한 후(32절)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인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 사 도들과 장로들에게 돌아갔습니다(33절).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 내용을 적은 편지를 안디옥 지역 이방인 형제들에게 전달한 전달자 유다와 실라를 생각할 때 우리 또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해 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다와 실라는 보냄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을 보 낸 편지의 발신자인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책임을 신 실하게 감당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파송 자이신 주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유다와 실라의 책임은 예루살렘 온 교회가 결정한 내용이 적힌 공문서를 안디옥으로 잘 가지고 내려가서 그 편지를 말로 이방인 형제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27절).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전달자 혹은 메신저들로써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이 세상에 나아가서 전해야 합니다.

 

셋째로, 전달된 메시지

 

 유다와 실라를 통하여 안디옥 교회에 전달된 메시지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내용은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4-29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 해 볼 수가 있습니다.

 

  • 첫째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어떤 사람이 사도들과 장로들의 사전 허 락 없이 안디옥에 내려가 이방인 형제들을 어지럽혔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4절을 보십시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예 루살렘 교회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은 안디옥 교회 이방인 형제들에게 공문서를 보내면서 자기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지역에 내려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 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치므로 말미암아(1절) 이방인 형제들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 것은 자기들이 시킨 것이 아니라고 해명합니다.

 

  • 둘째 내용은, 안디옥에서 올라온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 들을 선정하여 안디옥 교회 이방인 형제들에게 보내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5-26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들이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전달자 “유다와 실라”를 가리킵니다(23절).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27절 에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 라.” 이 두 사람이 할 역할은 그들의 구두 증언을 통하여 공문서에 포함된 중요한 결정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결하여 보내는 내용이 이 두 사람이 입으로 증거할 내용과 동일함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들의 허락 없이 예루 살렘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서 문제를 일으킨 상황을 완전히 권위 있 게 잠재우는 역할을 합니다(유상섭).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인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 사랑하는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 리”란 발신자와 수신자를 가리키는 말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23, 32절)임을 알려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예루 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나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바나바와 바울은 참으로 존경 받는 인물들이였습니다. 그들이 존경을 그렇게 받았던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셋째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결정된 핵심 사항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9절을 보십시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 핵심 사항은 다름 아닌 이방인 신자들이 삼갈 것들인데 그것은 네 가지로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입니다. 이 네 가지 항목은 이방인 신자들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계속 접촉하게 되는 유대인 신자들과 의 원만한 교제와 친목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유상섭). 이 네가지 항 목을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는 내용은 헬라어 문장의 뜻을 좀더 정확하게 반영하면, “이 런 것들로부터 너희 자신을 조심스럽게 지키면 너희가 바르게 처신하게 될 것이다”라는 내 용입니다(유상섭).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할 사실은 이 핵심적인 결정 사항이 단지 예루 살렘 교회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이 내린 결정이 아니라 28절 말씀처럼 “성령”의 주도적 인 인도 하에 내려진 결정임을 편지에 적었던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이것은 이미 19절에서 사도 야고보의 “의견”대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 롭게 말”라는 것과 동일한 내용임. 무엇을 보여 줍니까? 성령 안에서 예루살렘 온 교회가 마음이 일치하여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을 “형제”(23, 32절)로 받아들인 것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수신자

 

위로의 편지의 수신자는 바로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이 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3절을 보십시오: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유 상섭 교수님에 의하면 수신자인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로마 지방의 행정 단위로 볼 경우 한 지방에 해당되고, 안디옥은 이 지방의 수도”라고 합니다(Polhill, Bruce). 그렇다면 언급한 세 지명은 사실상 한 지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지역을 가리켜 우리는 안 디옥이라고 부릅니다. 이 안디옥 지역에 사는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 형제, 자매들에게 예 루살렘 교회 대표자 사도들과 장로들은 편지를 유다와 실라를 통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리 고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무리를 모은 후 편지를 구두로 전달하였습니다. 그 때 안디옥 지역 이방인 형제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30-3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위로의 편지의 수신자인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 렘 교회 지도자들이 보낸 공문의 내용인 권고 혹은 위로의 말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물론 우리의 본능은 이 해하기보다 이해를 받고 싶고,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받고 싶고 또한 누군가를 위로하기보다 위로를 받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받기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오늘 본문 말씀에서 교훈해 주는 것처럼 “위로의 편지”를 쓰도록 힘을 쓰십시다.

 

 

 

주님으로부터 위로의 편지를 받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