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

 

 

 

[사도행전 15장 12-21절 말씀 묵상]

 

 

얼마 전 미국의 “Christian Today”라는 잡지에 미국 교회의 성장 실태를 조사한 논 문이 실린 적이 있었는데 성장하는 미국 교회 100개를 선택하고, 그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 는가를 그 교회 목회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분석해 낸 것이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에 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넓은 주차장, 교회의 미래 비전, 창의적 프로그램, 새 신 자에 대한 열린 태도, 그리고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입니다(인터넷). 저는 이 특징들 중에 새 신자에 대한 열린 태도에 대해여 좀 관심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에는 새 신자들이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과연 우리 교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자”가 있 습니까? 이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전도에 힘을 써야 할 것은 다시금 제 자신부터에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새 신자를 환영할 수 있 는 우리 기존성도들이 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진심으로 새 신자를 대해야 합니다. “새 신자 양육의 원리와 전략”(명성훈)이란 책을 보면 새 신자 목회를 성 공하기 위해서 4M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첫째 M은, Mind(마인드)입니다. 교회 전체가 새 신자를 최고의 고객으로 삼고 모든 초점을 새 신자, 비신자 입장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부터 당회와 교회학교 에 이르기까지 새 신자를 왕과 왕비로 모시는 이른바 세계관의 변화(worldview change)가 일어나야 합니다. 항상 태도가 사실보다 중요합니다.

 

  • 둘째 M은, Men(사람들)입니다. 즉, 의식이 바뀌었으면 새 신자를 책임지는 사 람들, 즉 양육자 혹은 도우미가 잘 훈련되어야 합니다. 새 신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 는 도우미가 얼마나 확보되어 있느냐가 새 신자 목회의 관건입니다.

 

  • 셋째 M은, Method(방법)입니다. 새 신자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 훈련된 후에 각 교회에 적합한 전략적 방법론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좋다고 해서 그대로 도입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 마지막 M은, Management(관리체계)입니다. 새 신자 목회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리체계가 탁월해야 합니다. 새 신자 목회를 총책임질 수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그 지도자를 도울 스태프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15장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선교 보고를 한 후 자기의 의견을 모인 무리들에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여 기서 ‘괴롭게 말라’라는 말씀은 ‘짐 지우지 말라’는 뜻입니다(박윤선). 저는 오늘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무거운 짐 지우지 말라는 야고보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가만 히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12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 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과연 구원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인지 아니면 믿음 더하기 율법준수, 특히 할례를 행해야 하 는 것인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와 바리새파 유대인 신자들과의 많은 변론 후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했을 때 온 무리가 가만히 있었습니다(12절). 그리고 이 무리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고할 때 에 잠잠히 들었습니다(12절).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 곧 이방인 신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유대인 신자들은 좀 가만히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유대인 신자들처럼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유대인 신자나 이방인 신자나 다 동일 하게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베드로의 말을(11절) 가만히 있어 귀담아 들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아니 됩니다. “교회가 기 싫은 77가지 이유”란 책(저자: 이만재)이 있는데 그 77가지 이유 중 한 가지 대두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섯 번째 “술 담배도 아예 못하는 것이 싫다”는 것입 니다. 모든 77가지 이유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한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때 과 연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는 자들에게 교회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리새파 유대인 신자들처 럼 그들에게 멍에 또는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려는 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술 담배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리새인적 태도로서 술 담배를 참된 교인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면 그것도 잘못 된 일입니다. 임성빈 교수님(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 윤리학 교수)은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본 술 담배”란 제목 아래 요사이 교회 주변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 견들도 들려온다고 쓰셨습니다: "술 담배에 대한 극단적이며 배타적인 태도가 한국교회의 선교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었는지 아는가? 결국 영혼의 세계는 사모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인해 교인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많은 부담을 무릅쓰고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술 담배라는 하찮은 문화적 문제로 양심에 꺼림을 받게 함으로써 결국은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고 있지 않은가?”(인 터넷). 어느 여 성도님이 이런 질문을 목사님에게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희 남편은 교 회에 다니면서도 아직도 술과 담배를 아직 끊고 있지 못합니다. 자신도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잘 안 된다며 괴로워합니다. 더군다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의 지로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교회에 오면 그 문제 때문에 자꾸 죄 짓는 것 같다고 하는데 어떡하면 좋을지 도와주세요.” 목사님의 답변입니다: “랍비들을 교육하는 학교에서 탈무드를 읽는 동안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담배를 피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학생이 스승 랍비를 찾아가서 허락을 받아왔습니다. 학생은 스승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승님 탈무드를 읽으면 서 담배를 피우면 어떻습니까?" 스승은 "거룩한 탈무드를 읽으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안 된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갑 자기 탈무드가 읽고 싶어서 탈무드를 찾아 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그것은 괜찮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신앙과 담배에 대하여 같은 적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교회 에 다니는 사람이 담배를 일부러 피울 필요는 없습니다. 담배가 자신의 몸에 해롭고 모든 의사들도 금연을 권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던 불신자가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교회에 출석하고자 하는 발걸음을 귀하게 받아줘야 합니다. 기존신자들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초 신 자를 정죄하면 안 됩니다. 담배를 피우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보다 담배를 피우더 라도 교회에 출석하는 게 영혼에 훨씬 유익하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우리는 교회에 처음 나오는 자들을 괴롭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 리는 좀 가만히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처음 나오는 자들에게 쓸모없는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구원 얻는데 있어서 오직 주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해야 합니다. 제 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 구원이지 결코 술과 담배 등등이 아닙니다.

 

둘째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야고보는 오늘 본문 14 절부터18절까지에서 아모스 9장11-12절 말씀을 인용하면서까지 베드로의 7-11절 연설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의 핵심 내용의 말씀처럼 유대인 이니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11절)는 말씀이 맞는 다고 해명하였습니다. 야고보의 의도는 무엇 이였습니까? 그 의도는 베드로의 설교처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본질적으로 속했다 는 것입니다. 즉,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그가 사랑하는 선택한 백성들 중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돼 있음을 선지자(들)를 통하여 예언하였던 것이기에 베드로의 말씀처럼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줄을 믿어야 할 것 (11절)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오늘 본문 19절에 와서 자기의 의견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 게 말고.” 야고보는 바리새파 계통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방인 형제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 원 얻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조건을 부담시키지 말라고 바리새 판 계통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권면하습니다(박윤선).

 

주님을 찾는 자는 사도행전 13장38-39절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8-39절을 보십시 오: “… 이 사람(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 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주님을 찾는 자는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 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을 찾는 자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는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찾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민족과 문화와 각 족속의 규례를 다 떠나서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사람들, 오직 예 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은 다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기에 주님을 찾는 자는 헛된 멍에를 제자들에게 지게 하여 괴롭게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삼갈 것은 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20절을 보십시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야고보는 바리새파 계통의 유대 인 신자들에게 베드로의 말(7-11절)을 해명 또는 지지하면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 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자기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런 후 야고보는 일방적 으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 늘 본문 20-21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내어 삼갈 것은 삼가게 하므로 말미암 아 유대인 신자들의 입장도 배려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유대인 신자들의 말 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추가로 율법 준수, 특히 할례를 행하라는 강 조를 동의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모세의 율법에 근거 하여 삼가야 할 것은 삼가라고 편지를 써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어 지키게 하자는 권면 을 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이방인 신자들에게 삼가라고 당부한 것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유상섭). 그것은 다름 아닌 (1) 더러운 것(들), (2) 음행, (3) 목매어 죽인 것, 그 리고 (4) 피(20절)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것(들)이란 유대인 신자들의 관점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가리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 음식을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 결한 음식인 코셔(kosher) 음식 외에는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음식들을 먹으면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인 그들이 부정하게 된다는 신앙 때문 이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인 신자들의 관점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은 더욱더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 들에게 유대인 신자들의 관점을 배려해서 우상의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삼가라고 편지를 써서 권면하였습니다. 그리할 때 유대인 신자들과의 원만한 교제가 가능할 것이기 에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삼가라고 권면한 음행은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폭넓은 성적인 범죄이기보다 구약 성경에서 금지한 가까운 인 척 사이의 근친결혼을 말합니다(유상섭). 그 이유는 유대인 신자들은 근친과의 결혼을 정 죄해 왔지만 이방인들은 그리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이 란 말은 짐승을 잡을 때 목을 매어 죽이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죽이든 적절하게 피를 빼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   따라는 야고보가 이방인 신자들에게 삼가라고 당부한 것은 피를 제 대로 빼지 않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 에게 이러한 4가지 항목을 삼가라고 당부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이유는 유대인 들과 유대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4가지 항목은 금기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로부터 각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원만한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4가지 항목을 삼가줘야 할 것을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편지로 당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삼가야 할 것은 삼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문화나 언어 등 다른 세 사역이 함께 한 교회를 이뤄 나아가기 에 특히 서로의 문화 등을 배려하여서 주님 안에서 하나 되었음을 잘 지켜 나아가야 합니 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삼가야 할 것은 삼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9-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 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 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한 마디로,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고후 9:22). 바울의 최종 목적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였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9장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교회에 새로 나온 분들, 그 중에 예수님을 모르다가 전도 받아서 처음으로 예수님 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우리는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만히 있을 필요도 있고 주님을 찾아야 하며 또한 삼갈 것은 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아오는 자들을 사모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새 신자를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