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지 말라!

 

 

 

[사도행전 15장 1-11절 말씀 묵상]

 

 

“멍에”란 무엇입니까? 두 마리의 소를 연결시키거나 또는 수레 등을 끄는 짐승들 을 연결시키기 위해 동물들의 목에 올려놓았던 나무로 된 틀을 가리킵니다(인터넷). 추상 적인 개념으로 무거운 짐을 뜻하기도 하며 포로로 잡힌 사람들에게 사용될 때는 종속과 노 예상태를 상징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보통 율법과 죄악에 의해 억눌려 있는 상태를 비유 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사용된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 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그를 돕는 자를 가리켜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했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지고 있는 멍에는 어떠한 멍에입 니까? 종의 멍에입니까 아니면 자유의 멍에입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율법의 멍에를 지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을 좇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10절을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 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지 말라!” 는 제목 아래 한 3가지로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멍에”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율법의 짐”입니다(박윤선).  율법의 짐이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을 오 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1절과 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1절),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5절). 율법의 짐이란 율법 자체 보다 율법의 멍에란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순종하도록 요구된 관습이나 규정들입니다(유상 섭).  그 요구된 관습이나 규정 중 하나는 바로 할례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세의 법대 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짐이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 얻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멍에를 주님의 제자들에게 두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10절).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까? 분명히 구원 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니 인간의 행위(공로)로 얻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원 을 믿음 더하기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율법 준수하는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그의 책 “은혜의 각성”(The Grace Awakening)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제일 위험한 이단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 는가에 강조를 두기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에 강조를 두는 것입니다’(The one I consider the most dangerous heresy on earth is the emphasis on what we do for God, instead of what God does for us).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는가 또는 무엇을 행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한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가 참 많습 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무엇을 행하셨고 또한 지금도 하시는지 잘 묵상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행했는 지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갖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 운데 머물기보다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 다 우리는 우리 자신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둘째로, 누가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하였는가?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1절과 5절 말씀을 보면 성경 은 “어떤 사람들이” 그리고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바리새파 계통 의 유대인 신자들입니다(유상섭).  이 바리새파 계통의 유대인 신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 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유대에서부터 약 500km 떨어진 안디옥까지 내려와 이 방인 신자들에게 모세의 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사도행전10-14장에서 본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 게 보이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10장에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최초로 이방인 고넬료를 비롯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구원하실 때에 복음을 듣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지 할례를 받았다는 말 씀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이방인 교회, 안디옥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한 바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에서 안디옥까지 내려온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바리새파 계통의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형제, 자매들에게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1 절). 왜 이들은 할례를 그리 주장하였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할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참 유대인에 소속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유상섭). 다시 말하면, 바리새판 유대인 신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할례라는 것을 받아야 하나님 의 백성이 된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할례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결정적으로 확 정짓는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결정적으로 확정짓는 잣대입니다. 할례란 그저 유대인들의 관습이지 하나님 의 백성의 신분을 결정짓는 잣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들은 아브 라함으로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할례를 받을 수 있 었고 또한 자기 자식들에게도 할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할례가 구원을 얻는 방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15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와서 “당신의 제 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절)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 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절). 하나님의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데(4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 부모님들에게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5절)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6절). 그 때 예수님의 책망은 “너희 유전으 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는 존경하되 마 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8 절, 인용: 사2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 주의적 신앙생활을 경계해야 합니다. 종교적 전통이나 관습을 중요시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의 유전(전통)이나 관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해서는 아니 됩니다.

 

셋째로, 제자들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 라.”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은 오직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는 신앙입니다. 결코 할례나 인간의 선행 및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바 리새파 계통의 유대인 신자들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에 적지 않은 논쟁과 변론이 있었습니 다. 바울과 바나바와 바리새판 유대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2 절). 그래서 결국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최종 결정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2절) 바울과 바나바와 다른 지도자들을 예루살 렘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방인들의 개종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상세하게 보고했습 니다(3절). 그 때 두 지역의 신자들의 반응은 다 크게 기쁘게 하였습니다(3절). 예루살렘 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의 일행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 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4절). 그 때 바리새파 계통의 유대 인 신자들도 자기들의 주장을 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 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 는 것이 마땅하다”(5절). 결국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 베드로가 일 어나 결론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7-11절).

 

이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을 한두 가지로 찾 아 볼 수가 있습니다:

 

  • 참된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8절을 보십시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 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그가 선택하신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 암아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사실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 참된 제자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심을 받는 자들입니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 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오직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함을 받은 제자들의 신 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로서 성령님의 성화 역사 속에서 성결한 삶(생 활)을 살아갑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는 결코 율법의 멍에를 매지 않습니다. 그러면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지는 멍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멍에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1장 29-30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 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은사적인 혹은 능력을 행하는 것 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성이란 은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품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그리고 사고를 닮는 것입니다. 즉, 영성이란 영적 성품이나 영적 기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훌륭하다 는 것은 영적 성품이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 셔서 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이 마음이 쉼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메고도 쉼을 누릴 수 있는 그 단계까지 올라가야 참다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멍에의 무게에 눌려서 정신도 못 차리는 그 상태를 영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 하십니다(마11:30). 십자가가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십자가 무게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사랑해서 멘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영력이 라야 영성이 밑바탕 된 영력입니다.  비록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와중에 주님 안에 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영성, 그러한 가운데서 더욱더 예수님의 인격인 그의 온유함과 겸손 함을 본받아 가는 영성, 이러한 영성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나의 멍에를 대신 져주시므로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멍에를 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주님 안에서 쉼을 얻는 영성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