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 (1)

 

 

 

[사도행전 11장 19-30절 말씀 묵상]

 

 

유명한 성경 교사이며 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섬김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사람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 느냐, 손가락 하나로 오라 가라 할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로 기준을 삼는다. 또는 지적인 수준과 학문적인 탁월함, 임원을 맡고 있는 모임이 몇 개인지를 따지기도 한다. 또 많은 이들은 은행 잔고와 자산과 물질적 소유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위대함을 가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리는 평가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주님의 평가 기 준은 오직 한 가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있는 가다. 그 속에 위대함이 있다. 정 말 예수님을 닮고 싶다면 누군가를 섬기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다. 세상이 의혹에 찬 눈길로 교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야 말로 크리 스천이 마땅히 시도해야 할 도전이며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믿음을 방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인터넷).

 

세상이 의혹에 찬 눈길로 우리 교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 교 회는 어떠한 교회가 돼야 합니까? 우리 교회가 마땅히 시도해야 할 도전이며 피할 수 없 는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 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 2007년도 표어를 “섬기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교회를 섬기며, 가정을 섬기며,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섬기되 겸손하게, 즐겁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 19-30절 말씀 중심으로 “안디옥 교회 (1)”라는 제목 아 래 과연 안디옥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었는지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도록 힘쓰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안디옥 교회는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가 들었던 “이 사람들의 소문”은 무엇 이였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 들 중(19절)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님을 전 파하였는데(20절)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므로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 님께 돌아온 사실을 가리킵니다(21절). 이러한 사실을 소문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 람들까지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까 지 하게 된 것입니다(22절).

 

이 사도행전 11장 19-21절 말씀은 개인적으로 몇 년 전 저희 교회 지도자들과 성경 공부하다가 히스패닉 사역을 시작케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일로 일 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이방의 여러 지역인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가서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중에 몇 사람들은 안디옥에 가서 이 방인인 헬라인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 교회를 이 히스패닉 지역에서 옮기지 않게 하고 계시는가 생각해 볼 때 주님의 뜻은 이 지 역에 죽어가는 히스패닉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으로 믿고 히스패닉 사역자를 위하 여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0개월 후에 주님께서는 지금 히스패닉 사역을 섬 기시는 고메즈 목사님을 저희 교회에 보내주셔서 히스패닉 사역케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떠한 소문이 나고 있습니까?  혹은 어떠한 소문이 나길 바라고 있습니까?  언젠 가 한번 중앙일보에 저희 교회에 대해서 종교 란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 사역인 한국어 사역, 영어 사역, 그리고 히스패닉 사역이 한 교회 지붕 아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사역을 하 고 있음을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의 소문이 이렇게 났 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야 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된 교회다’, ‘어 떻게 다른 문화, 언어를 가진 세 사역이 어쩌면 저렇게 사랑으로 하나로 뭉쳐있는지 참 놀 랍다,’ ‘저 교회는 참으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는 교회야’ 등등 ….  교회 안에 문제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갈라지므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있지 못하 는 이 시대에 우리 교회는 한국어 사역뿐만 아니라 영어 사역 및 히스패닉 사역이 한 공동 체로서 연합된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주길 기원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안디옥 교회 처럼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를 보고 싶은데 몇 년 사역 가운데 그것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감사한 것은 히스패닉 사역을 통하여 우리 바로 교회 옆 아파트 이웃 가정들 중 세 가정(주로 엄마들과 자녀들)이 히스패닉 사역 예배에 참석하 고 있지만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의 나오는 안디옥 교회 역사가 이뤄지는 것 같은 느낌 이 저 개인적으로는 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메즈 목사님 부부와 우 리 한국어 사역 여성도 님들이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내려가고 있는 멕시코 티화나에서 일 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지난 날 11월 감사주일 연합 예배 때도 고메즈 목사님 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곳에서의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간증할 때에 여러 히스패닉 영 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또한 구세주로 영접케 하신 역사를 우 리가 들었는데 이번 12월 셋째주 토요일에 내려갔을 때도 4명의 영혼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고 계 시는지 그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 21절의 말씀처럼 주님의 손이 고메즈 목사님과 티화나 팀 사역자들과 함께 하시므로 일어나는 구원 의 역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 우리 교회보다 왜 티화나 그 곳에서 더 많이 나 타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고메즈 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우리 교회 지 교회를 그 곳에 세우는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그래서 새해 1월에 장로님과 함께 우리 당회 원들이 고메즈 목사님과 함께 티화나에 내려가서 보려고 합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어머니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에서 일 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낸 것처럼, 우리 는 고메즈 목사님 부부와 한국어 사역자들을 그 곳에 매 달 보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 다. 비록 우리 한국어 사역자들에게는 문화나 언어가 다르지만 그들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 을 통하여 우리 어머니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교회에 더욱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역사가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티화나 그 곳뿐만 아 니라 우리 교회가 조금이나마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고 있는 중국, 인도, 중앙아시아, 그리고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를 기원합니 다.   또한 새해를 맞이하여 “섬기는 교회”라는 표어 아래 우리 교회 지역 사회를 더욱더 겸 손히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섬기는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 이 지역에 좋은 소문이 나는 우리 교회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십시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어머니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서 일 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소문을 듣고 이방인의 선교를 인정하고 예루살렘 교회 의 중진 지도자 중 하나인 바나바라고 하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24절)을 안 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3절).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신 은혜를 보고 바나바는 기뻐했습니다. 진실로 수다한 이방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온 사실(21절)을 바나바는 안디옥에 내려가서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기쁨 속에서 안디옥 교회 형제, 자매 모든 사람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 하였습니다(23절). 이 권면의 말씀은 즉, ‘마음에 목적을 세워 가지고 주님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권면입니다(박윤선).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보냄을 받은 결과는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하게 되었습니다(24절). 그러니깐 흩어진 유대인 전도자들 중 몇 몇을 통하여 안디옥에 수다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그에게 돌아온 후에 바나바를 통하여 안디옥 교회는 더 큰 성 장이 이뤄졌습니다(21절). 그러므로 바나바는 혼자서는 안디옥 교회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 공동 목회를 하고자 몸소 다소로 가서 사울(바울)을 찾아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25절).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모여 있는 큰 무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제자 훈련을 철저히 시켰습니다(26절, 유상 섭).  그 결과 안디옥 교회 제자들은 질적으로 놀라운 성숙에 도달하므로 말미암아 처음으 로 비기독교인 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 의 추종자”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제자 훈련을 잘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좇았으면 주위 비기독교인 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다’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추종하고 있습니까? 아 니면 혹시 우리는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틀림없이 불행해질 수 있는 조건은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인터넷).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이중성을 가지고 살 때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 사업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혹시 교회에 다니면서 사업하는 사람을 모두 ‘크리스천 사업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 입니다. 만약 사업하는데 그 사업의 원리 속에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 법으로만 장사한다면 그것은 교회 다니면서 사업하는 사람이지 결코 ‘크리스천 사업가’는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 사업가’는 사업의 원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용해서 사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크리스천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직장 생활의 원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적 방법으로 직장 생활을 하며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만 정작 일터의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사업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원리 속에 성경의 원리를 적용해야 합 니다. 우리는 이중적인 신앙을 버리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밖으로 나타내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인터넷).

 

마지막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2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가운데 바나바와 사울의 공동 목회 사역을 통해 서 안디옥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 를 추종하는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선지자들 중(27절) 아가 보라는 선지가가 성령으로 예언을 하였는데 그 예언 내용은 “천하가 크게 흉년들이라”라는 예언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로마 총독 글라우디오의 통치 기간 중에 실현되었습니 다.   글라우디오의 통치 기간 중에 로마, 그리스, 애굽은 물론 유대 지역에까지 연속적인 흉 작과 이로 인한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습니다(유상섭). 이 큰 기근으로 유대 지역에 살 았던 사람들이 흑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결국 유대에 사는 교회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되 어 도움이 필요할 때에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고통 중에 있는 유대 형제들에 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작정하고(29절)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 장로님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30절).

 

여기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함에 있어서 사용한 원리를 찾 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원리는 다름 아닌 “각각 그 힘대로”(each according to his ability)입니다(29절). 이 말은 각각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구제금을 지원하였음을 의미합니다(유상섭). 이러한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사도행전 10장에서 묵상한 이방인 고넬료의 구제 활동을 생각케 만듭니다. 결국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한 이방인 고넬료의 구제하는 삶을 기록하였던 사도행전 저자인 의사 누가는 오 늘 본문 사도행전 11장에서 이젠 이방인 한 사람이 아닌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 공동 체가 어머니 교회라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모습 … 이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까? 흥미로운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후원으로 성장한 안디옥 교회, 즉 예 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빚을 지고 있었던 안디옥 교회가 경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 을 돕게 되므로 말미암아 이젠 교회적으로 유대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주님 중심된 교제가 더욱더 견고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개개 인인 유대인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와의 교제가 있었는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에서는 한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유대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의 교제가 더욱더 견고하게 되는 모습 …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주님 안에서 다 한 교회입니다. 유대인 교회이던 이방인 교회이던…

 

 

구제하는 교회는 풍족해 집니다. 성경 잠언 11장25절을 보십시오: “구제를 좋아하 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그러면 우리는 어 떻게 구제를 해야 합니까? 구제 방법 제안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인터넷):

 

  • 첫째로, 규칙적으로 구제헌금을 드려 구제를 생활화하십시오. 적은 액수일지 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자주 구제헌금을 보내면 구제가 생활화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 신에게는 적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 둘째로, 기도하는 가운데 구제의 대상을 잘 살피십시오. 막연하게 구제하면 구 제생활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결심했다면, 주님께서 그 대상을 밝혀 주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 셋째로, 자원하는 마음을 은밀히 구제를 실천하십시오. 구제는 억지로 해서 되 는 것이 아니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구제는 자랑하면서 하는 것이 아 니라 은밀하게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은밀한 중에 갚 아 주십니다.

 

  • 마지막 넷째로, 구제의 열매를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자기가 드린 구 제 헌금이 어떤 열매를 거두었을 때 그것을 혼자 기뻐하지 말고, 구제를 드릴 수 있도록 인 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구제를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 고 주님께 돌아오는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였 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안디옥과 같은 교회로 주님께서 세워 주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가 같이 주님께서 세우주시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