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사도행전 9장 32-43절 말씀 묵상]

 

 

“교회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은 무엇인가” 10가지를 제안 중 세 번째 요소”를 보면 “창조적 위기의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위기감이 없는 것입니다.  건전한 위기감(sense of urgency)은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입니 다. 개혁은 즐거운 대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절박한 행동으로 가능합니다”(인터넷). 크리 스찬 투데이 신문(2006. 10.11)의 실린 마크 부로갑 목사님의 글을 보면 극한 상황에 처할 때를 가리켜 “위기는 배움의 기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배움의 기회입니까?  (1) 첫째로, 우리는 위기를 겸손해질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을 품는 편을 택할 때 우리의 위기를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2) 둘째로, 우리는 위기를 자신의 과오를 시인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 셋째로, 우리는 위기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4) 마지막 넷째로, 우리는 위기를 모험 속에 기쁨을 나누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크리스찬 투데이).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32-43절을 보면 우리는 위기를 맞이한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누워있는 심령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누워 있는 심령들을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주시는 그의 능력과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누워있는 심령들

 

오늘 본문사도행전 9장 32-43절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첫째 부분은 32-35절에 나오는 ‘중풍병자 애니아를 치유한 사건’과 둘째 부분은 36-43절에 나오는 ‘도르가를 치유 한 사건’입니다. 이 두 치유 사건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33절과 37절 에 두 치유 사건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단어 ‘눕다’라는 단어입니다[(33 절) “… 누운 지 …”, (37절) “… 뉘우니라”].

 

  • 첫 번째 부분(32-35절)에 나오는 애니아(Aeneas)라는 사람은 룻다에 사는 사 람으로서(32절) 중풍병으로 상위에 누은 지 8년이 되었던 병자였습니다. 이 질병에 걸린 자는 신경이 마비되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병으로서 애니아는 8년 동안이나 신경이 마 비된 상태에서 누워있었습니다.

 

  • 두 번째 부분(36-43절)에 나오는 다비다(Tabitha) 또는 도르가(Dorcas)라는 주 님의 여 제자는(36절) 욥바에 살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병들어 이미 죽어서 장례 준비 하고 자 다락에 니운바 되어 있었습니다(37절). 이 두 사람 생각해 볼 때에 한 사람은 질병으로 신경이 마비된 상태로 8년이나 있어서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고 또 다 른 이는 아예 죽어서 일어날 수 있는 소망조차도 사라진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의 ‘영적 침체’ (spiritual depression)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강준민 목사님이 1989년 2월 5일 로고스교회를 개척한 정확히 4개월이 지나서 혹독한 영적 침체를 경험했을 때에 나타난 현 상 열 가지로 나누셨습니다(인터넷):

 

  • 첫째는 믿음을 상실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역설적인 확신이 찾아왔다. 하나님도, 의사도 나를 도울 수 없고, 나를 가장 귀히 여기는 어머님의 손길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다. 영적 믿음은 뒤로하고 자연적인 믿음마저도 상실했던 것이다.

 

  • 둘째는 의욕을 상실했다. 내 안에 있던 모든 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 에 유학 와서 공부를 마친 후에 무엇인가를 성취해 보고 싶었던 열망이 사라졌다. 그토록 좋아하던 책들을 모두 덤프트럭에 담아 버리고 싶었다. 식욕, 성욕, 성취욕이 사라지기 시 작했다. 마음의 소원이 사라진 것이다. 소원과 함께 소망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셋째는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현실이긴 했지만 죽 고 싶었다. 자살이 죄가 아니라면 자살하고 싶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엑셀레터를 밟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로 위험한 생각이 찾아 왔던 것이다.

 

  • 넷째는 무력감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찾아왔다. 기력이 쇠 진한 것을 느꼈다.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다. 자신감은 능력에서 온다.   그런데 무력감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다.

 

  • 다섯째는 정체성의 혼돈이 찾아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누구냐”는 질문 을 심각하게 시작한 것이다. 영적 침체로 쓰러져서 개척한 교회를 그만 둔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냐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목사라는 신분으로 지탱해 왔고, 공부하고 있다는 학생의 신분으로 지탱해 왔는데 그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면 나는 누구냐는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개척한 교회를 내려놓고, 목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가슴에 품었던 큰 꿈도 내 려놓는다면 나는 누구냐는 질문이 엄습해 온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가장 혹독한 시험은 정체성의 시험이었다. 마귀는 세 번다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님께 의혹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세 번 중에 두 번은 “만일 네가 하나님 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정체성을 흔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 여섯째는 모든 세상이 어둡게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 각을 상실했다. 목회에 관한 긍정적인 안목을 상실했다. 모든 것이 어둡고, 부정적이고, 힘들게만 보였다. 핍절의식, 실패의식, 절망의식, 불가능의식, 피해의식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염려와 두려움이 시시때때로 찾아 왔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난하는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교회 개척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 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세상이 문제였다. 내 안에 있는 영혼의 창이 맑지 못함으로 모든 세상이 어둡게만 보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의 내면은 어두웠고, 나의 내면의 대화는 너무나 부정적이었다.

 

  • 일곱째는 생각의 초점이 흐려졌다. 스트레스란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찾아오 는 데서 생긴다.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짐이 무겁게 느껴질 때 일어나는 현상 이 스트레스다. 만약에 생각이 분명하고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스트레스는 쉽게 극복된다. 영적 침체는 생각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더욱 나의 목회의 짐이 무 겁게 느껴졌다.

 

  • 여덟째는 몸이 연약해 지면서 몸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영적 침체를 통 과할 때 받은 염려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염려가 찾아오면서 두려움이 일어났다. 염려가 찾아오면서 믿음이 약해졌다. 염려가 찾아오면서 심장이 뛰고, 손이 차가워지면서 식은땀 이 났다. 생각에 따라 육체가 급격하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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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홉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다. 영적 침체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겼다. 특별히 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개척을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피 해의식이 생겼다.   내게 일어난 영적 침체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느끼는 것보다 사람들을 탓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가장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그 때에 오직 홀로 있기를 원했다. 그런데 더 괴로웠던 것은 홀로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 웠다는 사실이다. 영적 침체를 통과하기 전에는 홀로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영적 침체 중에 있을 때 홀로 있음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홀로 있는 동안에 어두운 생각들 이 나를 찾아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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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시련은 사명감을 상실한 것이었다.   목회자는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다. 사명감이 투철할 때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사명감은 우리를 고고하게 만든다. 환경을 초월하게 만들고 죽음마저도 극복하게 만든다. 바울은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라면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았다(행 20:24).   그런데 나는 영적 침체로 사명감을 상실하면서 로뎀나무 아래 쓰러졌던 엘리야처럼 하나님 앞에 생명 거두기 를 구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영적 침체의 현상 중 한 두개라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 니면 혹시 지금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상태이십니까? 만일 그러시다면 예수님 안에 소 망이 있습니다.

 

둘째로, 다시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

 

이미 우리가 사도행전 3-4장에서 묵상하였던 것처럼 베드로는 선천적으로 앉은뱅 이로 태어나 40년간을 비참하게 산 걸인을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한 사건을 경험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으로 8년 누워있었던 애니아의 치유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유상섭).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3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 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이미 사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치유 했을 때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걸으라”(3:6)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에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3:7)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3:8).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34절에서 애니아를 치유함에 있어서 베드 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하 였습니다. 그 결과 애니아는 “곧”(immediately)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룻다와 사 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애니아)를 보고 주께로 돌아” 갔습니다(35절). 오늘 본문에 나오 는 두 번째 이적인 다비다라는 여 제자를 죽음에서 일으킨 사건은 좀 더 구체적으로 저자 누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36-43절). 먼저 “다비다”라는 아람어로 된 이름의 뜻은 “은혜롭 고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노루”를 의미한다고 합니다(박윤선).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 그 한 예로 베 드로가 욥바로 청함을 받아 와서 다비다의 시신이 있는 곳 이르렀을 때에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에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도르가)가 그들과 있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 어 보였습니다(39절). 이 속옷과 겉옷들은 다비다가 선행과 주제하려고 지은 옷들 이였습 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여 제자 다비다라는 자매는 신앙이 참으로 독실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의 사망을 심히 가석 히 여겨(38절) 베드로를 청해 왔습니다(박윤선).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릅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다비다의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하였습니다(40 절). 이 베드로의 “다비다야 일어나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누가복음 8장54절에서 예 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아이야 일어나라”[“달리사 쿰”(막5:41)]고 외친 것을 생각 나게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5장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 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 결과 다비다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행9:40). 베드로가 손을 내 밀어 그녀를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녀의 산 것을 보여주었습니다(41절). 그 결과 온 욥바 사람들이 알고 많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42절).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우리 주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15장 26절을 보십시오: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왜 하 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룻다에 사는 누은 지 팔년이 된 중풍병자를 치료하고 또한 병들 어 이미 죽은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리셨습니까? 그 이유는 사도행전 4장29절 하반 절에서 30절에 나와있습니다: “…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 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8년 된 중풍 병자를 치 료하시고 이미 죽었던 다비다를 살리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또한 효과적 으로) 선포되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8년 된 중풍 병자를 주님께서 베 드로를 통하여 치료하셨을 때 결과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갔습니다(35절). 또한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났을 때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42절). 유상섭 교수님의 말입니다: “이러한 치유와 그로 인한 대대적인 전도는 사도들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오늘 날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 추수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간구 하면 주님은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이와 같은 역사를 행하실 것이다. 문제는 치유를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 하는 데 있다. 이 점만 조심한다면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유상 섭).

 

잊지 못하는 설교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시 일어선 엘리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탈진하여 영적으로 침체해 있는 “누워있는 심령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 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능력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마치 중풍병으로 상위에 누운 지 8년이 되었던 병자 애니아를 치료하시사 일으키셨던 것처럼 우 리 주님은 우리를 충분히 일으키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예수 님께서는 병들어 이미 죽어서 장례 준비 하고자 다락에 니운바 되어 주님의 여 제자 다비다 (도르가)를 살리셨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일으키실 수 있으십 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을 쓰십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복음성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 안에서 오뚝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