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사도행전 9장 19절 하반절 - 31절 말씀 묵상]

 

 

회심한 사람은, 즉 예수님 만나 변화된 사람들은 더욱 변화된 삶을 살도록 부름 받 았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는 더욱더 변혁(transformation)의 삶을 살아 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변혁의 삶을 더욱더 진전시키는 것입니까?

 

  • 첫째로, 믿음과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킵니다. 믿음은 자기 충 족, 자기 의존, 자기 몰두를 모두 버리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며 하나 되어 교제하게 합니다. 소망은 확신을 유지해주며, 냉담함과 절망을 모두 쫓아냅니다.

 

  • 둘째로, 회개와 순종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킵니다. 회개는 슬프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잘못된 일을 행하다가 이제 옳은 일을 행하려는 겸손한 정직함입니다. 순종은 우리 편의에 따라 예외를 두지 않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따라 양심 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 셋째로, 의존과 기대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킵니다.

 

  • 넷째로, 굴복과 꾸준함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킵니다.

 

  • 다섯째로, 찬송과 헌신 가운데 사는 것은 변혁을 진전시킵니다. 교제와 봉사의 삶을 사는 것 역시 변혁을 진전시킵니다(인터넷).

 

사울은 회심 후에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더욱 변화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 을 받았는데 그 부르심의 삶을 사도행전 9장15-16절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 니다. 그 두 가지는 다름 아닌 복음 전파의 사명과 고난의 사명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19-31절 말씀에 근거하여 이 두 가지 사명을 감당하는 변화된 사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한 세 가지로 묵상 하며 삶 속에 적용하기를 기원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는 힘을 더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2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 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 울은 주님의 명령(6절)에 순종하여(8절) 다메섹으로 들어갔을 때에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를 만나 그의 안수를 받고(17절) 다시금 볼 수가 있게 되었으며, 세례를 받고 또한 음식을 먹 고 강건하여졌습니다(18절). 그런 후 그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19 절하) 그는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20절). 그 때에 그의 전파함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 이였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 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당연 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자를 박해하던 자가 그 예수님을 믿어 변하여 복음을 전하니 어찌 다 이 기적 같은 일에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을 듣는 사 울은 그러나 오히려 힘을 더 얻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였습니다(22절). 과연 사울 이 더 얻었던 힘은 무엇 이였을까? 음식을 더 먹어서 육신적으로 힘을 얻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19절).   이것은 “영력”(spiritual power)을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결국 사울은 그의 영력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이 구약에 근거하여 명백함을 지적하므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혼란시켰습니다(22절)(유상섭). 여기서 사울이 얻었던 “영력”이란 무엇입니까?

 

영력이란 영적 힘(spiritual power)을 의미하는데 그 힘을 한 네 가지로 저는 저희 교회에 모든 심령들에게 적용하길 기원합니다. 그것은 ‘기도의 힘’, ‘성령의 힘’, ‘말씀의 힘’ 그리고 ‘사랑의 힘’입니다. 영력은 영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그리고 사고를 닮는 것입 니다(인터넷). 즉, 영성이란 영적 성품이나 영적 기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훌륭 하다는 것은 영적 성품이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영성은 은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품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은사적인 혹은 능 력을 행하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을 부르셔서 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 는 것이 마음이 쉼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11:28-30).  멍에를 메고도 쉼을 누릴 수 있는 그 단계까지 올라가야 참다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멍에의 무게에 눌려서 정신도 못 차리는 그 상태를 영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십자가의 무 게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사랑해서 멘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수 있 는 그 영력이라야 영성이 밑바탕 된 영력입니다(인터넷). 이러한 영력을 우리는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각자에 십자가를 지면서도 가볍게 느낄 수 있는 영성이 밑바탕 된 영력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 라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 능력 을 간구하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 사랑의 능력.

 

둘째로,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23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 이기를 공모하더니.” “여러 날”, 즉 “많은 날들이 지난 후에”(유상섭) 사울의 예수님의 메 시아, 즉 그리스도이심을 들은 다메섹 유대인들은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였습니다(23절). 그래서 이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다메섹 도성의 모든 성문까지 지켰습니다(24절). 이 계교를 알게 된 사울은 그의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려(25절)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 28절에 나 오는 ‘사울 죽이기를’에서 ‘죽이다’라는 단어는 ‘제거하다’는 의미로서 이미 우리가 묵상한 사도행전 8장1절에도 나와 있는 단어입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나기 전에 사 울은 스데반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의 메시아(그리스도)이심 을 증거하였을 때 다메섹 유대인들에게 제거를 당할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습 니까? 스데반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이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 서는데 유대인들에게 제거당하는 위험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왜 사울은 이 러한 위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앞으로 사울이 주님께 택한 그릇으로서 복음 증거의 사명과 고난의 사명을 동시에 감당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9:15-16)(유 상섭). 이미 예수님도 그의 공생애 때 시편 2편1-2절 말씀의 예언처럼 “세상의 군왕들”인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왕들이 합동으로 자기를 대적하신 것을 경험하시사 고난을 당 하셨는데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유대인들의 합동으로 공모하여 죽이려고 하는 핍박과 고 난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바울처럼 고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 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 증거의 사명과 고난의 사명을 동시에 감당해야 합 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의 사명에 대해서 한 두가지 중요하게 생각되는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 가운데서 복음 증거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에 고난이 다가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22절에서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 명한 후 많은 날이 지난 후에 고난의 사명을 감당했어야 했던 것을 볼 때에 우리 또한 크신 능력 가운데 복음 증거를 감당할 때에 큰 핍박과 고난도 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 23절에서 “여러 날”, 즉 “많은 날이 지난 후”에란 말씀 은 사울의 아라비아 생황의 3년 기간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갈라디아서 1장17절을 보십시 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 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의 사명에 대해서 얻는 교 훈은 광야의 생활 후에 고난이 다가올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 님처럼 광야에서 영성훈련을 쌓은 후 사울처럼 영력을 더 한 후에 유혹과 핍박, 고난이 올 수 있음을 예상해야 합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행9:16)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마지막 셋째로,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귀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27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 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 공모를 하므로 그의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다메섹 도성을 빠져나온 사울은 예수살렘으로 향했습니다(26절). 그 가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귀고자(교제하고자)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두려워하 여 사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이때에 사울에게 있어서 너무나 귀한 만남을 주 님께서 주셨습니다. 그 만남은 바로 바나바와의 만남 이였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가진 바나바는 바깥으로는 유대인들의 대적과 핍박 그리고 안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 신(사울의 개종을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고립되어 고독한 가운데 있었던 사울을 바나바 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사울의 개종 사건과 그가 개종 후 다메 섹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 증거한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울 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다메섹에서 했던 것처럼 예루 살렘에서도 동일하게 복음을 담대히 전파했습니다(29절). 그 때에 헬라 파 유대인들이 사 울을 죽이려고 힘쓰므로 말미암아 사울은 또 다시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다소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첫째로, 두려움과 불신의 부정적인 면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 받고 사명을 받은 사울을 예루살렘 제자 들은 다 두려워하여 사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결국 사울을 고립시켰었는데 이렇게 된 원인은 예루살렘 제자들의 두려움과 불신 때문 이였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있 는 두려움은 우리 안에 상대방을 향하여 불신을 낳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 상대방을 용 납하지 않고 품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사귐,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사울도 바나바의 도움을 받지 못해 계속 예루살렘 제자들과 교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긍정적인 만남입니다다시 말하면, 사울에게 있어서 너무나 귀한 바나바와의 만남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세 만남이 본문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a) 첫 째 제일 중요한 만남은 물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2) 둘째 만남은 그 가 다메섹으로 들어와서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와의 만남입니다. (3) 그런 후 세 번째로 오 늘 본문에서 바나바와의 만남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 다 물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제일 근본적인 만남이 돼야 하며 그 후에 만남 속에서 우리는 바나바 와 같은 신앙의 선배나 위로 자, 즉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우리에게 유익한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 셋째로, 우리는 바나바처럼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27절을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데리고”란 헬라어 동사는 신약에 18번 등장하는 단어로서 “꽉 잡다” 혹은 “붙잡다”라는 의미입니다(유상섭). 이 단어는 흔히 “강제로 붙잡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눅20:20, 23:26; 행16:19, 17:19, 18:17, 21:30,33,23:19). 이는 바나바의 행동이 사울의 부탁과 당부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발적으로 강요하여 사울을 사도 들에게 끌고 갔음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울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했는데 바나 바는 오히려 그에게 접근하여 그를 꽉 잡고 사도들에게 인도한 것입니다(유상섭).

 

변화된 사울로 인하여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어떠한 결과를 도래했었습니까? 오 늘 본문 사도행전 9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무 서운 핍박 자 사울이 개종하고 보니 교회는 외적으로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때에 교회는 두 가지, 곧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전진하였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생 활이 더하여지는 동시에 영적 평안도 더해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때의 교회는 신자들 의 숫자도 증가하는 도중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생활의 내적 생명이 풍성해진 데 따 르는 결과입니다. 영력이 빈약한 교회는 신자들의 수적 증가를 확보하지 못합니다(박윤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인,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담대히 선포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