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나의 그릇”

 

 

 

[사도행전 9장 10-19절 상반절 말씀 묵상]

 

 

18세기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영적 부흥 운동을 아십니까? 이른바 대각성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빛이 되고 소망이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대를 비롯하여, 유수한 대학들도 이 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서 있었습니다.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시대의 목회자요, 신학자 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시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매일 다섯 가지 결심 을 고백하며 자신을 새롭게 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살아갔습니 다. 한 순간의 시간이라도 결코 놓치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그 것을 선용하였습니다. 아무리 큰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타인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 는 것이라면 결코 취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도 원한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인생에 있 어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좋은 기회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은 일이라면 선 택하지 않습니다(인터넷).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 떠한 결심을 고백하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0-19절 상반 절을 보면 부르심을 받는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나옵니다. 저는 오늘 아 나니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명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 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1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 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 기 있나이다 하니.” 우리는 이미 “주여 뉘시오니까”라는 제목 아래 사울의 간증을 묵상했 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울의 모습(Before Christ),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을 만난 순간(On Christ),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후(After Christ)의 사울의 모습을 묵상했었 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9절). 그 때에 주님 께서는 다메섹에서 그의 제자 아나니아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8-9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서 들려주신 말씀의 구체적인 진술을 제시합니다(6절). 결국, 주님은 그의 택한 그릇인 사울(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시켜주시고(중생) 또한 그에게 사명(commission)을 주신 후 다메섹으로 들어가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두 가지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을 보십시오: “…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그 두 가지 목적은 바로 바울의 눈을 다시금 보게 하는 것과 성령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 또 다른 목적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는 모든 유대 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를 통하여(22:12) 교회를 광적으로 핍박하며 살인한 사울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데 사용 하셨습니다(유상섭). 아무도 사울의 개종 소식 을 믿지 않으려고 할 텐데 주님께서는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 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를 통하여(22:12) 사울의 개종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고 그의 제자들은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므로 말미암아 감동을 주므로 사울을 믿는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같습니다(유상섭). 주님께서는 환상 중에 그의 제자 아나니아를 부르셔서 구체적으로 명령을 하셨는데 그 명령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 면 사울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9:11).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주님의 제자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환상 중에 부르셨을 때에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 까? 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반응하였습니다(10절). 이러한 반응은 어린 사무 엘도 했고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세 번이나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그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반응하다가 엘리 제사장이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깨닫고 사무엘에게 다음에 주님께서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삼상3:9). 그래 서 사무엘은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 준대로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였 습니다(10절). 이사야 같은 경우도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그의 반응은 “내가 여기 있나 이다 나를 보내소서”였습니다(사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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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은 어떠한 자에게 그의 제자를 보내시는지 명심해야 합니다.  한두 가지로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1-12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a) 첫 째로, 주님은 그의 제자를 기도하는 자에게 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 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 아나니아를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보내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13절에서도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던 바울과 그의 일행으로 하여금 기도하러 기도처에 모인 루디아와 그의 일행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b) 둘째로, 주 님은 그의 제자를 비전을 본 자에게 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2 절을 보십시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이미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비전을 통하여 아나니아라 하는 사 람이 자기에게 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실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유일한 확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오직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는 성령만이 부르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등, ‘부정적 자질의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80세의 늙은 목자였습니다. 다윗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양치는 어린 소년이었고, 요셉은 노예였으며, 다니엘은 포로 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사용하신 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예들을 발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은 소명을 낳습니다. 역사상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한 소명을 위해 부르 셨다는 믿음으로 사명의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 월 24일,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화재의 불길로부터 구조되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 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영국 교회에 ‘개 혁’이라는 소명을 위해 주께서 자기를 살리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이 진정으로 소명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질 때,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잠재력에 불을 붙일 수 있으며 삶을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마지막 둘째로, “가라”고 다시 명하시는 주님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 님께서 그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기도하고 있는 사울, 이미 비전을 본 사울에게 가라고 명하셨을 때에 아나니아는 주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 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 온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 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13-14절). 아나니아 입장에서는 주님의 명령이 참 받 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기독교인을 핍박함에 있어서 산헤드린 공회 지도자인 대제사장에게 공문까지 받아서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고 아나니아는 다메섹 교회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서 사울의 표적(target)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다메섹 도 상에서 중생한 사울의 변화된 모습을 모르고 있기에 그에 입장에서는 당연히 주님의 이 명 령이 어렵고 또한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칼빈은 이때의 아나니아의 의문은 하나의 공포심으로 나타난 불신앙인 듯하다 라고 말하였고 슐라텔(A. Schlatter)이란 학자는 여기 아나니아의 말이 공포심을 나타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문제시함이라고 하였 습니다. 곧, 그 말은 어떻게 사울과 같이 무서운 핍박 자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달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표시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에 의아해 하 면서 주저하고 있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다시금 아나니아에게 “가라”(15절)고 명하시면서 그 “가라”는 이유 두 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 “가라”는 첫 번째 이유는 사울이 주님의 택한 그릇이기 때문 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여 기서 “택한 나의 그릇”이란 표현은 도구 혹은 물건을 담는 용기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운반”하는 주님의 도구로 주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지 금까지 사울의 활동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하고 죽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주 님의 이름을 운반하고 온 세상으로 나가는 선택받은 도구가 된 것입니다(유상섭).

 

  • 가라”는 두 번째 이유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주님께서 사울에게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울은 주 님의 택한 그릇으로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에게 다시 가라고 명하 셨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주셨던 이유는 사울의 사명이 복음 증거요 고난 받음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했을 때에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대로 즉시 직가로 가서 그곳에 있는 유 다의 집을 찾아 방문하여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17절). 그리고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이렇 게 말하였습니다: “…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 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7절). 놀랍지 않습니까? 아 나니아는 사울을 가리켜 “형제 사울아”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핍박 자 사울, 그러가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사울을 주님을 믿는 동 일한 형제로 여겼습니다(유상섭). 더 나아가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 서 만난 예수님이 자기를 사울에게 보내셨다고 말한 후 그 이유가 두 가지, 즉 다시 시력을 찾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사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습니다(18절).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가라”고 명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 찾으라’(11절)고 명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나니아처럼 “주여 이 사 람”(13절)은 … 하면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머뭇거릴 때 참 많습니다. 그리할 때 주 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가라”고 명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택한 그릇들입니 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운반하는 수레입니다.  이 사명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사명도 주어졌습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사명)에 어떻게 반응하 시겠습니까?

 

“사명으로 사는 사람의 끝이 아름답습니다”(인터넷). 사람은 무엇을 중심으로 사 느냐에 따라 4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첫째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2) 둘째는 편리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3) 셋째는 쾌락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4) 넷째는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 들입니다. "독자적인 경영과 이노베이션(미야타 와하키로 저)"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 다. 탁월한 기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이 익의 질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이 이익을 내는 데는 비용이나 경비를 절감하여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이익은 높은 생산성을 통해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 질 좋은 이익은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독자성 있는 이익을 내는 것이 라고 합니다. 둘째는 전략과 관리를 통시에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전략을 통해 이익을 남 기고 관리를 통해 낭비를 방지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원점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 다. 원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도 일평생 살면서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성공한 인생을 서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인터넷).

 

 

 

주님께 택함을 받아 주님의 일군이 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더욱더 이끌림을 받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