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뉘시오니이까?”

 

 

 

[사도행전 9장 1-9절 말씀]

 

 

과연 우리는 변화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화입니다.   신앙은 변화에 대한 의지입니다. 교회는 변화를 체험했을 뿐 아니라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 니다(옥한흠)(인터넷). 그러나 우리는 변화를 갈망하지만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 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낙심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영적 상태에 대해 “거지인가 왕자인가” 라는 책의 저자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대부 분의 크리스천들이 연약함과 실패와 미약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있으며, 무능력과 무기력이 라고 하는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저자의 갈망은 바로 이러하 다. 즉 변화된 삶이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싶어 한다. 저자의 말처 럼, ‘변화된 삶이라는 놀라운 선물은 과거에 대한 용서나 미래에 대한 약속 그 이상’이다. 이 선물은 바로 현재적인 우리의 삶에 관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변화된 삶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받아 누릴 것인가? 저자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자리바꿈”이란 말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바꿈은 항상 두 방향으로 일어난다고 한 다. 사실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아직도 삶의 어떤 부분을 나 자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자리바꿈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에게 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여 내 안에 살아계시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 리바꿈을 위한 첫 번째 단계를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김, 양도, 또는 헌신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단계를 신뢰, 혹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이라고 부른다”(인터넷).

 

우리가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알 아가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성경 에베소서 4장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 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9절을 보면 사울이 다메섹 도 상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 로 사울의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변화를 추구하는 계기가 되길 기원합니 다.

 

첫째로, 위협과 살기등등한 사울을 보십시오(예수님을 믿기 전).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 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개종하던 때가 바로 그의 발악의 최절정이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박윤선).   그는 우리가 이미 묵상했다시피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도 “…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곤 했었습니다(8:3). 그런데  그는  “여전 히”(still)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9:1). 여기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는 말씀은 사울은 숨을 내쉬듯이 주님의 제자들을 대항하여 위협과 살인을 여전히 뿜어내고 있 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이 뿜어내고 있었던 숨은 주님의 제자를 해아는 위협과 살인의 숨 이였습니다(유상섭). 그러므로 사울은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청하였 습니다(2절). 그 당시에는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 밖에 있는 유대인 관할권을 산헤드린 공 의회에 맡겼고 사울이 만났던 대제사장이 바로 그 산헤드린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당시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인도 송환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에 사울은 그 대제사장을 만난 것입니다(박윤선). 왜 사울은 이 대제사장을 만났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위협적이고 살인적인 숨을 내쉬면서 다메섹까지 가서 “그 도” 즉, 기독교를 좇 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다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다메섹은 수리아(시리아)에 있는 약대 상들의 무역 교차로에 위치한 아주 중요한 고대 도시로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도보로 한 6일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사울은 이렇게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 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그가 변화를 받은 후 빌립보서 3장6절 상반 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빌3:6). 왜 사울은 이렇게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였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디모 데전서 1장13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이었 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울이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한 원인은 불신앙과 무지였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을 지체하 지 않은 것은 철두철미한 유대교 신앙 때문입니다(유상섭).  그의 철두철미한 유대교 사상 의 관점에서는 십자가의 처형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은 결코 수용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결코 십자가에 처 형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유상섭). 사울에게 있어서 기독교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은 ‘의무’였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기 전에 사울처럼 ‘불신앙과 무지’ 가운데서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모태신앙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사 울처럼 잘못된 혹은 삐뚤어진 신앙관과 확신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 혹은 성경적인 신앙생 활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놀랄만한 일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불신앙과 무지로 말 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우리 목사님들이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성도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있지 않나 염려됩 니다(호4:6). 이러한 무지의 결과는 불신앙이며 불신앙의 결과는 불순종입니다.   우리는 어 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우리 또한 같은 고백을 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8).

 

둘째로, 땅에 엎드러진 사울을 보십시오(예수님을 만난 순간).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4절을 보십시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 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다메섹에 갈 공문을 받고 가는 도중에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사울을 들러 비추었습니다(3절). 그 때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졌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서 사울을 들러 비춘 빛은 승귀하신 예수님에게서 반사된 빛이었습니다(유상섭).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17절).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시므로 말미암아 하늘로서 홀연히 빛이 사울을 둘러 비췄던 것입니다.   이 빛 가운데서 들렸던 승귀하신 주님의 음성은 “사울 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음성에는 사울이 기독교 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핍박하는 것과 같다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 니다(박윤선). 이 진리는 우리가 바울의 편지에서도 자주 보게 됩니다. 즉,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비유하는 바울을 볼 때에 예수님과 교 회는 분리할 수 없는 연합된 관계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교회를 핍박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곧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울은 “주여 뉘시 오닌까”라고 질문합니다(5절). 여기서 사울 이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라고 존칭한 것은 사울에게 있어서 빛 가운데 말씀하시는 분이 신적 존재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적 존재가 꼭 예수님이라고 사울은 아직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유상섭).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울의 질문인 “주여 뉘 시오니이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사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 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사울의 모든 신학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유상섭). 이 순간이 바로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목숨 걸고 증거하는 선포 자가 되는 대전화의 순간 이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중에 계신 주님에 의해 구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가지고 갈 자로 부름받 았습니다(유상섭). 다시 말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중생(Conversion)과 부르심(사 명)(Commission)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다메섹 도상의 사울처럼 대전환점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또한 주님으로 영접하고 또한 그의 부르심(사명)을 받은 그 대전환점이 있었 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무지함 가운데서 사울처럼 살다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또한 주님으로 영접하며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명감에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인생 최고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의 인생 에 전환점이 생깁니다. 위대한 사람마다 인생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위대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위대한 인생은 언제나 위대한 전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전과 그 이후가 달라지는 분수령이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에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변화를 묻는 질문을 접할 때마다 다메섹 가던 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다 메섹 가는 길에서 인생 전환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아니 (그보 다 훨씬 더 위험하게) 잘못된 목적에 사로잡혀서 살던 바울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였습니다”(인터넷).

 

마지막 셋째로, 사람의 손에 끌려가는 사울(예수님을 만난 후).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8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다메섹 도상에서 승귀하신 예 수님을 만나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울은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예수님을 질문을 하였습니다(22:10).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 니다(9:6). 그 이유는 성으로 들어가면 사울에게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를 주님께서 준 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입니다. 그 때에 사울과 같이 가던 일행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습니다(7절). 여기서,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 는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승귀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유상섭). 그런데 사도행전 22장9절에 가서 보면 사울과 함께한 자들이 “말하는 이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로 모순된다고 보기보다는 서로 다 른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9장은 동행하는 자들이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22장은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 곧 말의 내용 을 알아듣지(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유상섭). 후에 사울에 땅에서 일 어나서 눈을 떴지만 그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 일행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 다(9:8). 그리고 사울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9절).

 

여러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무기력해진 사울을 보십시오.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 여러 회당까지 가서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려고 했었습니다(9:1-2).   그러던 사울이 예수 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에는 오히려 같은 일행 사람들에게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9:8). 기독교인들을 다메섹에서 끌로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는 모습, 어떻게 보이십니까? 우리는 참으로 무기력해진 사울의 비참한 모습을 봅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사흘 동안 식음도 전폐한 사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철저히 무기력해진 사울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좀 철저히 무기력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에스겔 29장15-16절을 다시 보면서 하나님께 서 애굽 나라를 미약한 나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시는 세 가지 이유가 있 습니다:

 

  • 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높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에스겔29장15절을 보십시오: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열국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   스스로 교만해 질 위험이 너무 많은 우리들은 무기력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 둘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다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에스겔29장 15절을 보십시오: “…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열국을 다스리 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교만해져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죄악 된 본능이 나를 다스리도록 놓아둘 위험이 많은데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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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셋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바라보았던 것들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게 하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을 다시는 기억나게 하 지 않게 하시고자 입니다. 성경 에스겔29장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 속의 의뢰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 악이 기억나게 되지 아니 하리니 그 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오늘 이 말씀 묵상은 사도 바울의 간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의 예수님 을 믿기 전과 믿게 된 당시와 믿은 후에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가서 청하였습 니다.   그 이유는 그는 예수님의 도를 좇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 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던 그 순간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님을 만나므로 그는 중생하였고 또한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을 믿 은 후의 바울의 삶은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다메섹에 아나 니아라 하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납니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사울은 그 주님을 만나므로 거듭나고 구원을 얻어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러 한 구원의 은총을 주님께서 우리의 태신 자들에게 허락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예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아 알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