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vs. 빌립

 

 

 

[사도행전 8장 1-8절 말씀 묵상]

 

 

에이든 토저 목사님의 “세상과 충돌하라” 제1장인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을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은 함께 나란히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 들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상대를 잘라버린다.   이 과정에서 마찰과 적대와 갈등과 심지어 핍 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복되신 성령님은 세상의 편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우리 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님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으로 깨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 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그분은 깨끗한 성소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처소를 영광스러운 곳으로 만들기를 원 하십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면 거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불경스럽고 더러운 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토저).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 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7장에서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과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대조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죽이는데 허락한 혹은 지시한 사울이란 인물과 성령 충만한 빌립 집사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성령님을 거 슬러 살다가 나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 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한 평신도 집사입니다. 저는 오늘 사울이란 인물과 빌립 집사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성도가 되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 을 받고자 합니다.

 

사울은 큰 핍박을 몰고 온 자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 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7장에서 묵상했던 것처럼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는 목이 곧은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죽임을 당했는데 그 당시에 사울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돌로 치던 유대인들이 당시의 사법적인 관례에 따라 죽임당한 스데반의 옷을 벗겨 사울의 발에 갖다 놓음으로 그의 죽음이 정당했음을 보여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스데반의 옷 대신 자기들의 옷을 사울의 발 앞에 벗어 놓은 것은 그들이 스데반을 죽인 행위가 사울의 허락 혹은 지시에 따라 되어 진 것임을 상징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유상섭).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1절에 와서 보면 저자 누가는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 더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죽임 당함”이라는 명사는 “죽여 제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명사형으로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등장합니다(유상섭). 이 단어의 동사형 은 신약에서 23번 등장하는데 그중 21번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등장합니다(유상섭). 저자 누가가 이 동사를 주로 부당한 죽음을 묘사할 때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결국 스데반 의 죽음은 부당한 죽음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박해자 사울이 보기에는 마땅히 여겼습 니다. 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을까요? 그 이유는 사울이 그 만큼 스데반 이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했던 그리스도 의 복음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 하면, 유대교 사상에 입각하여 철두철미하게 지켜왔던 바리세인 중에 바리새인 이였던 사울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 나님이 보시기에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죽었는지 도무지 사울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 이였기에 그는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파 되는 것을 막고자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는 초대 교회 핍박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잔멸할 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 습니다(3절). 여기서 “잔해하다”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여기 단 한번 써졌는데 이 단어는 ‘사 나운 들짐승이 몸을 물어뜯어 죽이는 행동을 묘사하는데 써졌습니다. 사울은 남녀를 가리 지 않고 잔해하였습니다. 여자까지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울의 잔인성이 극단 이였음을 보여줍니다(박윤선).

 

이러한 사울이 몰고 온 초대 예루살렘 교회 큰 핍박으로 인하여 어떠한 일이 벌어 졌습니까?    다시 말하면, 큰 핍박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 첫째로, 경건한 성도들이 크게 울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2절을 보십시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 하여 크게 울더라.” 경건한 사람들, 즉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 신자들은 당시 공개적으로 처형된 사람을 위해 공개적으로 애곡하는 것이 금하는 관례가 있었는데(유상섭) 이 관례를 어기고 스데반을 장하하고 그를 위하여 크게 울었습니다. 이렇게 ‘큰 핍박’은 ‘큰 울음/슬 픔’을 가지고 왔습니다.

 

  • 둘째로, 기독교 신자들이 옥게 감금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3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나운 짐승처럼 기독교인들을 찾아 나선 사울은 각 집 (가정교회?)을 수색하여 남녀 신자들을 억지로 질질 끌어내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유상 섭).

 

  • 셋째로, 사도들 외에 모든 신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1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울과 기독교 박해자들로 말미암아 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고 다들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 아의 온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멀리 소아시아 지역까지도 흩어졌습니다(행 11:19)(유상섭).

 

현대 교회 안에서 사울과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인은 ‘율법 주의적 교 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삐뚤어진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 삐뚤어진 신앙관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불 붙듯한 교인입니다. 이들은 사울처럼 성경 지식도 있고 열정도 뜨 겁지만 올바른 성경지식도 아니요 또한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열정이기에 참으로 위험한 교 인입니다. 이 율법 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엄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경우 자신이 선한 존재라고 자부하는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노 력에 의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 험스러운 점은 그들이 복음의 핵심을 놓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점입니다(인터넷). 씨맨즈 (David A. Seamands)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 중 가장 어렵고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어내기 위 해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씨맨즈).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 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고서도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 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경건에 어느 정도 근거하는 조건부 사랑의 형태 로 바꾸어버리고는 그 사랑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공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며 경건 의 노력을 기울입니다(박영돈). 하나님의 은혜에만 계속 신세지며 사는 것은 자기 의를 숭 배하는 인간의 교만한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합니다. 은혜만을 의존하는 오직 믿음의 원리 는 너무도 단순하고 쉬운 성화의 길로 보이기에 우리 안의 일종의 직관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심슨(A. B. Simpson)은 신자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그들이 행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려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인터넷).

 

과연 우리 안에 이러한 율법 주의적 태도(혹은 경향)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습 니까? 그러므로 사울처럼 교회에 큰 핍박은 아닐지라도 큰 어려움을 몰고 오지는 않은지 자아성찰 해 봐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말미암아 바울이 고린도전 서 15장10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빌립은 큰 기쁨을 가지고 온 자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8절을 보십시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울과 기 독교 박해자들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서(1절)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4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 님의 섭리입니까? “그 날에”(1절), 즉 스데반이 순교한 날에 큰 핍박(1절)으로 말미암아 큰 애곡(2절)과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지만 결국은 주님께서는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케 하셨습니 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는 좀 흩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만 교회가 모이려 고만 하면서 개교회 성장에만 초점을 맞춰 힘을 쓴다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 성장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은 모순입니다.  교회는 가르칠 교, 혹은 교제할 교자 에 모일 회자를 씁니다. 교회는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흩어지는 모 임이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교회는 모여야 하고 동시에 흩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행전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교회가 흩어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것 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으로 흩어진 뒤에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 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교회가 흩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고, 전진입니다”(인터넷). 흩어져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 5절부터 빌립이란 인물이 나 옵니다. 이미 우리가 사도행전 6장5절에서 묵상했던 것처럼 빌립은 구제품의 원만한 배포 를 맡기 위해 선택된 7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헬라 파 소속의 일반 평신도 중에서 스 데반과 같이 매우 적극적인 복음 선포 활동을 한 인물 이였습니다(유상섭). 그 당시에는 사마리아에 대한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편견 때문에 유대인 신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 자들조차도 사마리아 지역에 감히 갈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빌립 집사는 그 시대의 생각 을 초월하여 사마리아 도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유상섭). 그 때 빌립 집사의 복음 사역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세 가지였습니다:

 

  • 첫째는, “무리”가 일심으로 빌립의 말하는 것을 좇았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6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여기서 초점은 빌립이 행하였던 “표적”이 아니 라 빌립이 전파하였던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빌립 집사를 일심으로 좇았던 이유는 표적보다 “복음의 말씀”이였습니다.

 

  • 둘째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7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빌립 집사는 예수님 처럼 더러운 귀신들도 사람들에게서 좇아내었고 또한 중풍 병자들과 앉은뱅이들도 치유하였 습니다. 여기서 “많은”이란 단어가 두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빌립 집사를 통하여 “큰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13절).

 

  • 셋째로,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 8절을 보십시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울과 기독교 박해자들로 말미암아 “큰 핍박”(1절)이 있으므로 ‘큰 슬픔’(2절)이 있었지만 결국은 주님께서는 빌립 집사를 통하여 “큰 능력”(13절)을 나타내시사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큰 기 쁨”을 허락 하셨습니다.

 

이번 주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이사야 61장10절 말씀과 62장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왜 우리가 기뻐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까? 왜 우리에게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 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 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61:10).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큰 기쁨으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사62:5). 성경 스바냐 3장17절을 보십시오: “너희 하나 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 리라.”

 

우리 하나님은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시30:11). 비록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사울과 같은 자들의 “큰 핍박”으로 말미암아 ‘큰 슬픔’이 임했지만 결국은 그 큰 슬픔을 돌이켜 “큰 기쁨”을 주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큰 슬픔을 돌이켜 큰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이 큰 기쁨을 맛보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 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 이다”입니다(시43:4).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의 슬픔을 돌이켜 나의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