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곧은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7장 51-54절 말씀 묵상]

 

 

“고집”이란 무엇입니까? 고집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내세우며 굽히 지 않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억지가 남에게 자기의 생각을 제시하여 관철하려는 과 정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고집은 남에게 자기 생각을 능동적으로 제시하여 관철하기 위해서 도 쓰이고, 수동적으로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생각대로만 하는 경우에도 쓰입니다. 고집 가운데에서 가장 센 고집으로 옹고집과 황소고집을 듭니다.   옹고집은 콱 막혀 결코 꺾을 수 없는 고집이고, 황소고집은 황소처럼 우직하여 좀처럼 꺾기 어려운 고집을 가리킵니다. 고집도 부리고, 세우고, 피우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출 32:10).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인간의 고집과 어리석은 거만을 비유하는 표현입니다(인터넷). 목이 곧다는 것을 목이 뻣뻣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멍에를 매는 소와 관련이 있다. 소가 멍에를 지우려고 하면 목을 부드럽게 하고 고개를 숙이고 해야 하는데 멍에를 매기 싫어서 고개를 쳐들고, 목을 뻣뻣하게 하고 발두둥을 치는 것을 말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51절을 보면 “목이 곧고”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저는 오 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1-54절 말씀 중심으로 “목인 곧은 그리스도인”이란 제목을 걸고 과 연 목인 곧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한 세 가지로 묵상해 보면서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만일 우리가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라면 하나님께 회개 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첫째로,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거스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1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지금 스데 반을 재판하는 목이 곧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켜 “너희가 성령을 거스려”라고 말하고 있는 데 이 말씀은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라는 현재형 의미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자 기의 연설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성령님을 거역한 사실을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모세와 그 이후 하나님께서 세운 지도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할 때 목이 곧은 그들은 성령을 거역했고 그들의 후손인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도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를 배척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님을 ‘거스리다’란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거스리다’(resisting)란 단어는 ‘대립/충돌하 다, 반대하다, 거슬리다, 적대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거스리다’란 말의 의미 는 성령님의 메신저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거절함/반대함/적대시함을 의미합니다 (MacArthur).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성령님을 거스렸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조 상들처럼 영적 순종함을 외적 예배로 바꾸었습니다(Furneaux). 이 말은 성령님의 메시지에 순종하기보다 외적(겉) 모양으로 드려지는 예배로 대신하였다는 말입니다. 대리만족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의 메시지는 거절하면서 자기 종교적 만족을 누리고자 껍데기 예배에 헌신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님을 거스렸습니까? 왜 그들은 성령님을 거역하고 거절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육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으나 그 심령으로는 그렇지 못 하여 실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기업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로서 율법이나 성전의 외형에는 치중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하는 육체 적 종교가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서 영적 순종의 삶보다 육체적 종교가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령님을 거슬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1) 첫째로, 우리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칭찬 받는 성 도들이 돼야 합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을 보십시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 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 나님에게서니라.” (2) 둘째로, 우리는 “마귀를 대적”(Resist the devil) 해야지 이스라엘 백 성들처럼 성령님을 대적하면 아니 됩니다. 성경 야고보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 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

 

둘째로,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은 의인을 핍박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2절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 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지금 스데반은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와 더불어 그들이 범하고 있는 죄를 적나라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의 조상들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보내사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케 한 선지자들을 핍 박하고 결국은 죽인 죄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메시 아의 오심이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이 지금 자기의 연설을 듣고 있는 청취자들인 유대인들에 게 예수님의 무죄성과 의로움을 강조하면서 그 의로우신 예수님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적나라케 들춰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여기서 유대 민족의 근본 죄악의 정곡을 찔렀 습니다(박윤선). 그 근본 죄악의 정곡은 바로 메시야를 죽인 죄였습니다.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은 표면적 그리스도인으로서 내면적 그리스도인을 핍박합니 다. 성령님의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거절한 채 자기 종교적 만족을 위하여 경건의 모양을 추구는 하지만 경견의 능력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교회를 세속화하면서 주님 의 의를 나타내기보다 자기의 의를 들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사 말 씀을 전파케 하신 주님의 종들을 핍박하며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또한 마음으로 형제, 자 매를 미워하므로 살인합니다.   성경 요한일서 3장15절을 보십시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마다 살인하는 자니 ….” 우리는 불의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 가의 공로로 의롭다 일컬음을 받은 우리는 서로를 마음으로 미워하므로 살인죄를 범하기보 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로,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 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지금 스데반은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 죄악의 정 곡을 찌르면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살인한 “너희”들이 천사가 전해 준 율법을 받고서도 이를 준수하지 않은 자들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천사를 경유하여 주셨는데(갈3:19; 히2:2) 그 율법을 받고서도 그 율법이 예언한 예수 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오히려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으니 과연 이들 이 율법을 지키는 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귀하에 여겨서 그 율법을 공 부하고 연구하고 그렇게도 묵상하면서도 그 율법의 핵심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 이사야30장 9절을 보십시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 어하는 자식이라.”

 

우리는 어떠합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키고 있습니까? 찬송 가 379장을 보면 우리는 모두 다 집을 짓는 자들로서 반석 위에 집을 짓던지 아니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3절).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듣고서 준행함 을 말합니다.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은 자들은 비가 오며 물 나며 바람 부딪쳐도 넘어 지지 않습니다(1절).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터 닦고 집 을 지음 같아서 비가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칠 때 크게 무너집니다(2절). 과연 우리는 집 을 잘 짖고 있습니까?   이번 주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대화하면서 참으로 사탄이 우리 가 정들을 공격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부의 갈등, 그 갈등을 보면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입는 상처와 아픔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 활을 해야 합니까?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 다. 신앙의 성숙도를 어떻게 잴 수가 있을까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 는 옥토의 밭과 같은 마음(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서 말씀을 듣기를 속히 하여 그 말씀을 듣 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물론 말씀의 흡수력이 부족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받아들인 말씀들을 즉 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 게 해야 합니까?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훈련 중에 중 요한 것은 묵상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가운데 그 말씀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 묵상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주신 깨달음이 있으면 그 깨달은 말씀을 즉시 행 동으로 옮기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미루는 습관을 경계해야 합니 다. 그 이유는 미루다보면 잊어버리고 그러므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실 천으로 옮기자는 결심 속에서 순종하다보면 말씀 즉시 순종하는 습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은 이를 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 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것은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마음이 찔 려 심히 분개하였음을 말해줍니다. 자기들의 조상들까지 들먹이면서까지 자기들에 죄까지 도 적나라케 드러내는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려 심히 분개하는 가운데 이까지 갈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 순간 얼마나 스데반을 죽이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결국은 스데반을 죽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 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의 찔림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첫 번 째로 마음의 찔림의 긍정적인 반응은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이미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에 찔려 결국 회개하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마음 에 찔림의 부정적인 반응은 사도행전 5장 33절과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4절에서 말씀하 고 있는 것처럼 마음에 찔려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분개하여 이를 가는 것입니다(5:33). 여 기서 첫 번째 긍정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축복(blessing)이 되는지 를 가리켜 주고 있고 두 번째 부정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저주(curse)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있는가 아 니면 저주가 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오늘 지금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의 찔림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찔림의 결국은 무엇일까요? 회개일까요? 아니면 분노일까 요?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은 그리스 도인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양심에 찔림 이 있다면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분노하는 게 아니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거스려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의인을 핍박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찔려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거스리는 목이 곧은 그리스도인,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참된 회개를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