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3)

 

 

 

[사도행전 7장 36-38절 말씀 묵상]

 

 

해오름 교회 최낙중 목사님의 지도자 정의가 흥미롭습니다: “지도자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다.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조화시켜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일색으로서 하나 가 아니다. 다양성의 조화를 이룬 하나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귀 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영적 지도자다.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안의 매는 줄 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인터넷).  우리 교회에게 적합한 지도 자 정의라 생각합니다. 한국어 사역, 영어 사역, 그리고 히스패닉 사역 형제, 자매들을 조 화시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저와 우리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책 “소명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을 보면 해리 투르만 대통령의 멋진 말이 나옵니다: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고, 나중에는 그 일로 인해서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리더십이란 일반 회중들이 하기 싫어하고 기피하는 일을 먼 안목을 가지고 끌어 들이는 것 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이 하기 싫어하던 일을 통해 행복과 기쁨을 맛보도록 해 주는 것입 니다. 따라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는 것이 그 특징입니 다”(옥한흠). 리더십은 지도력입니다. 그리고 지도력은 영향력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 니다.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리더십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6-38절을 보면 모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지자였습니다. 저는 오늘 모세를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귀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모세는 인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36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 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인도자, 좀 더 우리 에게 다가오는 말로 한다면 ‘지도자’는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 혹은 지도해야 합니까? 저는 제일 좋은 방법이 모범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므로 지도하 는 것이 최고의 지도력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자들이 돼야 하는가 생각해 볼 때 헨리 나우웬의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우리 지도자 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성경 민수기 12장3절을 보면 “모세 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 유하고 겸손하십니다(마11:29). 즉, 모세는 예수님을 닮은 인도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겸 손하셨던 것처럼 모세도 겸손했습니다. 겸손하되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지도력에 있어서 인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력이나 능력보다 지도자에게는 꼭 필 요한 것, 즉 없어서는 아니 되는 요소는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격 중에 예수님과 모세처럼 “겸손”은 지도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도력에 있어서 겸손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 4:6).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필요 한 능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것입 니다(행7:36).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기사와 표적”은 무엇 이였습니까? 애굽에서 하나님 께서 내리신 10가지 재앙, 광야에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갈라놓으신 것(출14:1-31), 르비 딤에서 하수를 모세가 지팡이로 쳤을 때에 물이 난 것(출17:1-7),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멸망 (민16:1-40)입니다(MacArthur).

 

여기서 우리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도 자는 먼저 인격자가 돼야지 실력자가 되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지 도자는 먼저 겸손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우리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나 실력, 능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 시대나 그 전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던 것처럼 골 방에 들어가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인도하였는데 요즘 저와 같은 젊은 세대는 골방이 우선이 아니라 도서관, 세미나 실, 컴퓨 터 방 등등 너무나 실력 위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격이 뒤받쳐 주지 않는 실력은 좇는 자들을 교만하게 만들 뿐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코 쉴만한 물가로 또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도자, 겸손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능력과 세상적인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이 나타납니다. 우리 지도자들은 바울이 말한 진리를 마음 심비에 더욱더 깊이 적어야 합 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 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27). 시편 77편 10절 말씀 “…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라는 시편 기자 아삽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돼야 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 람 앞에서 고백할 줄 아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진정한 겸손한 인격자입니다. 우리 지도자들에겐 이것이 절 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둘째로, 모세는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 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여기서 스데반 은 구약 성경 신명기 18장15절에 기록된 모세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모세 의 예언에 “나와 같은 선지자”란 말씀은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지자는 바로 모세 였습니다. 모세만큼 위대한 선지자는 유대인들에게 없었습니다. 근데 스데반은 이 최고의 선지자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이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 설교에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22절)께서 “선지자”이심(30절)을 유대인들을 듣고 알고 있었기에 스데반의 본문 설교에서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청중 유대인들을 알 고 있었습니다(유상섭).   여기서 우리는 모세와 예수님의 선지자의 역할을 생각해 봐야 합 니다.   선지자의 역할이란 모세나 예수님 두 분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중보자 역할 을 감당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중보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 들에게 선포하는 선지자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의 두 계명인 하나님 사랑, 이 웃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와 예수님과의 다른 점은 모세는 “율법의 중보자” 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은혜의 중보자”이십니다(박윤선). 모세의 선지자적 말씀 선포는 율법을 순종하므로 구원 이였지만 예수님의 선지자적 말씀 선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을 받는다는 복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우리는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신실한 삶은 하나님 사랑, 이 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선지자적 역할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시 말 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 다는 것입니다.

 

  • 첫 번째 책임은 복음 선포는 입술로나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가 돼야 합니다. 우리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자가 되지 못한 자가 복음 전파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 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복음 전파가 아니라 복음의 장애가 됩니다. 우리 때문에 상대방이 교회를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함부로 전도하지 마십시다!”란 글을 써 보았습니 다. 그 글의 한 부분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을 생각 나게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행함은 너무나 바리새인들처럼 또는 예수님 을 믿기 전에의 바울, 즉 사울의 모습처럼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사람 보기에 완벽한(?) 기 독교인의 모습을 갖추 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진실 되지 못한 인격과 삶, 위선이 가득한 마음과 삶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 앞에서 들춰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전도를 방해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 는 복음 전도, 무능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입술은 사랑을 외치질 모르지만 사랑을 상 대방이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 밖에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 회의 전도 프로그램이나 기독교 단체에서 받은 전도 훈련 등등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가 운데서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증인의 삶으로 하려고 하 기 전에 증거로 하려고 하지 않 나 생각합니다. 존재 자체는 증인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면서 열심히 증거를 하려고 하니 결국 교회로 인도는 할지 모르지만 전도자의 삶을 보면서 시험에 들어 교회에서 상처를 입 고 떠나 다시는 교회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영혼으로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제임 스).

 

  • 두 번째 책임은 복음 선포 후 상대방의 “거절”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 입니다.

 

오늘 스데반 설교를 보면 35절에 “거절하던 모세”, 그리고 39절을 보면 “거절하 여” 라는 단어가 이렇게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최고의 선지자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 은 선지자”인 예수님을 거절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1절을 보십 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렇게도 기다렸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그 러므로 예수님의 길을 좇은 제자들로서 우리는 그의 복음을 삶과 입술로 전파하면서 상대방 이 거절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피스러운 것은 이단 사람들은 그들 이 믿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면전박대를 당해도 더욱더 열심인 반면에 우리 크리스천들 은 진정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거절을 당하면 낙심하고 고개를 쑥이지 않나 생각 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결핍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거 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전파의 선지자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모세는 광야교회 목회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8절을 보십시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 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 라”. 과연 목회자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성도님들이 원하는 목회자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한국 장로교 정치제도에 대한 일반성도 의식조사 보고서”(1997년 6월 27일 교갱협 기획 실)를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한국의 장로 교인들이 바라는 오늘의 목회자상 은 어떤 것입니까? 그 의식을 조사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목사는 영성 있는 설교자여야 합니다. 장로교단에서 목사의 역할 중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들의 과반수를 훨씬 넘긴 67.3%가 '설교'라고 응답했고, 그 다음으로 12.1% 정도의 응답자들이 '기도'라고 응답했습니다.   “성경 연구”(8.1%), “심 방, 상담”(4%), “전도, 선교” (3.1%), “교육”(2.3%), 기타 (3.1%). 교인들은 전적으로 헌 신된 목회자를 요구합니다. 설문 응답자들에게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에 어떤 유형의 목회 자가 요청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응답자들이 1순위로 선택한 것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유형으로서 32.3%였고, 그 뒤를 이어 요청되는 유 형은 24.2%가 응답한 '교인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유형'이었습니다. 이외에 각 10% 정도의 응답을 받은 목회자 유형은 '탁월한 영성으로 절대적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는  유형 (12.1%), '책임지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유형'(11.7%),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신앙생활 하도 록 방임하는 유형'(10.3%)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교인이나 장로에게 일임하는 유형'에 대한 응답은 고작 3.6% 정도에 지나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목회자 는 지도자여야 한다'는 교인들의 기초의식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 시 대에 요청되는 목회자는 영적 공동체가 도달해야 할 목적과 방향성을 주도적으로 제시하되 먼저 헌신하는 자세를 가진 지도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극단적 군림이나 극단적 인 방임의 자세를 가진 목회자는 더 이상 현실 속에서 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 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목회자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백성(성도님들)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도하는 것입니 까? 우리는 선지자의 역할인 말씀을 충실하게 선포하므로 양 떼들을 인도해야 합니다(37 절). 이 두 구절을 통하여 목회자의 책임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님들 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은 모세는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8절).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기 위해선 먼 저 생명의 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 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선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 “마음의 길: 사막의 영성과 현대의 사목직”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 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선 우리 주님과 만나고 그 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고독에서 우리의 첫째 과제는,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분을 생각과 마음을 다해 바라보는 것 이다. 우리는 은총의 상황 안에서만 우리의 죄에 직면할 수 있고, 치유의 장소에서만 우리 의 상처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주의에서만 우리의 고착된 두려움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을 대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자기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강제들을 서서히 녹여 없앨 수 있고 하나 님 자녀로서 의 자유를 체험하게 된다”(나우웬). 고독한 광야에서 목회자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각과 마음을 깨닫은 은총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의 음성을 사 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들 춰지고 그 죄를 직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을 대면해야 합니다(나우웬).  그러한 가운데서 나의 죄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믿음으로 겸손히 나아가 야 합니다. 회개하는 가운데 사죄함을 받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 도가 사시는 것이라는 고백(예수님이 나의 참된 자기)을 믿음으로 할 수 있게 될 때 진리 가운데 참된 자유를 누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 에서 우리 목회자는 모세처럼 광야에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크리스찬 투데이”(2005. 5.  17) - 창간  9주년 특별 인텨뷰(조정칠 목사님)  내용 중 인터뷰하는 사람의 질문에 조 목사님의 대답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50년의 목회 경험을 통해 한국교회를 진단한다면?” “교회는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도록 좋은 이미지가 살아 있어야 한다.  지금은 교회 이미지에 대해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교회의 좋은 이미지 가 자꾸만 퇴화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 제이다. 나도 목사이지만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 한 인교회는 하나님이 임재 한 것 같은 모습이 회복될 때 참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런 교 회의 모습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목사 에게 책임이 있다. 목사가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을 못주니 교인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 각을 못한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을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것 같 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 한다”(크리스찬 투데이).

 

 

 

광야의 영성을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께 인도함을 받으므로 맡겨주신 양 떼들을 인도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