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2)

 

 

 

[사도행전 7장 30-35절 말씀 묵상]

 

 

작년에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 1위는 빌게이츠도, 클린턴 전 대통령도, 부시 대통령도 아니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라 는 여성 토크 진행자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 평균 1000만이 넘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미국인들은 감동을 받는다. 그녀가 "가난한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도움이 필요해요"라고 10초만 얘기하면 다음날 그 고아원에 수십억의 기부금이 도착합니다. “이 책을 읽었는데" 한마디 하면 그 책은 다음날 미국 내 베스트셀 러가 됩니다. 그녀의 이런 영향력을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녀의 자서전책, “이것이 사명이다”에 나오는 네 가지 인생철학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1)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 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2)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3) 셋째, 남보다 설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4)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게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녀는 혼혈아로 태어나 가난과 아 픔 속에서 자랐고, 혼자 공부하면서 성경 속 모세를 통해 오늘의 자신을 일구었노라고 간증 합니다(인터넷).

 

사명감을 가진 사람의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인터넷):

 

  • 첫째, 삶의 최우선순위가 사명완수이기에 외골수로 한 길을 팝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 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빌3:14). 앞에 있는 한 가지 목표에만 전심전력을 쏟아 붓기 때문에 남이 무엇 하는지 곁눈질할 틈도, 과거의 회한에 사 로잡힐 틈도, 현재의 어려움을 불평할 틈도 없습니다. 어떠한 주위의 난관도 사명감에 사 로잡힌 사람의 눈에는 돌파해갈 대상이지 두려움이나 불평할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렇게 살았기에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 둘째, 사명에 대한 긍정적 사고와 사명완수에 대한 적극적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 느니라"(4:13). 이러한 적극적, 긍정적 자세를 가지고 상급을 받으려고 달리는 100미터 경 주자처럼 외골수로 전력 질주함으로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 셋째, 사명감이 있는 자는 사명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합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마저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행20:24).

 

  • 넷째, 사명감이 있는 자는 결과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명을 받는 모세가 나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세를 들어 일으켜 사용하셨는지 한두 가지로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음 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들어 일으켜 사용하시는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가 얻는 유익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먼저 우리의 모든 일 속에서 믿음이 살아나 힘차게 운동합니다. 특히 우리가 곤경에 처했 을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조금만 고개를 돌려 도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 을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합니다. 우리의 소 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례해서 자라납니다, 우리의 소망은 더욱 확고히 자라게 되며, 우리의 생활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 때, 우리의 의지는 하 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태워버립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더욱 사랑하 게 되고, 더욱 섬기게 되고, 더욱 찬양하게 되고, 더욱 예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 나님의 존재는 믿어도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 하는 사람들은 더욱 적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놀랍고 큰 유익을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0절부터 보면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된 모세가 나옵니다. 그는 애굽에서 40년 생활 후 미디안 땅에서 “사십 년이 차매”(30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30절).   미디안 땅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나그네로 40 년의 세월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가 시나무 떨기”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불꽃”은 그 백성 그 때에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상 징합니다(박윤선). 불이 가시나무에 붙어도 그것이 사위지 않음 같이, 이스라엘이 애굽 인 들도 말미암아 고난을 받아도 아주 멸망하지는 았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괴로 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태어나게 하셨고 그 후 80년이 지난 후에서야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보이셨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가시나 무 떨기 불꽃”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갔을 때(31절) 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졌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32절).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무서워서 감히 얼굴을 들고 쳐다보지 못했습니다(32절).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 라 너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33-34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4 가지 교훈을 받을 수가 있 습니다:

 

  •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곳이 바로 시내 산 광야 가시 나무떨기 불꽃 가운데 였습니다(30절). 흥미로운 점은 “시내 산”이란 말의 뜻이 “가시의 산”입니다. 즉, 가시의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이렇게 “가시”란 의미나 말 이 두번 나오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무시하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라 우리의 고난당함을 보고 계시며 또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므로 우 리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 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  “가시”하니깐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7절에서 말한 “육체의 가시”가 생각납니다.  그 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이유는 한 마디로 “너무 자고하 지 않게 하려 하”시고자 였습니다. 그 때에 그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습니다(8절). 그 때에 주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 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였습니다(9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이런 저 런 모양의 ‘가시’로 말미암아 고난당하고 있을 때도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을 통하여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는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고난의 가시’입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모세가 시내 산 광야에서 가시나무떨기 불꽃을 보고 기이이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 이 갔었을 때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행7:31).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야겠지만 특히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더욱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합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마음의 길”이란 책에서 4세기와 5세기 이집트 사막에서 살았던 사막의 교부들의 사막의 영성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 일 단순히 고독이 분주한 일에서의 도피이고, 침묵이 시끄러운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라 한다 면 고독과 침묵은 쉽게 매우 자기중심적인 금욕주의의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독과 침묵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이 사막의 교부들은 고독을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 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우리 “기도생활의 위기”를 맞이하지는 않았는지요? 우 리의 기도생활의 위기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의 지성(머리)이 하나님께 대한 관념으로 차 있다는데 있습니다(나우웬). 우리는 찬송가 500장 1절의 가사 가 우리의 고백이 돼야 합니다: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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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의 더러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모세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였습니다(33절).   근동 지방에서 제사장들이 성전 봉사를 할 때에는 신을 벗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신’은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거룩하니만큼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박윤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항상 우리의 죄를 들춰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처럼 두려움 가운데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더러운 죄를 거룩하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 들춰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영적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보시고 또한 그들의 탄식 소 리를 들으셨던 것처럼(34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의 더러운 죄를 회개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시고 듣는 것을 우리 또한 보고 들어야 합니다. 즉, 고난당하 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봐야 할 것이며 또한 그들의 고난의 신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세처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 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란 인터넷 글을 참고합니다(인터넷):

 

  •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려면, 순결하게 사십시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할 어떤 행동이나 말,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는 늘 이렇게 살기 어렵고 때때로 넘어집니다. 그럴 때에 즉시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용 서를 구하십시오. 만약 우리가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연기하지 말고 회개 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내일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려면,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잠잠한 믿음과 겸손한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방해하는 세상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려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기 로 결심하십시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리고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언제나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하는 것을 공급해 주시기를 요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실 것입니 다.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께서 들어 일으켜 사용하시는 모세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4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 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 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스데반은 그의 연설을 통하여 40년 기준으로 하여 모세에 관 한 언급을 세 기간으로 나누었습니다: (1) 첫째 기간은, 애굽에서 40년(23-29절), 둘째 기 간은, 미디안에서 40년(30-35절), 그리고 (3) 마지막 기간은,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의 40년 (36절). 오늘 본문 30-3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디안 땅에서 40년이 차매 하나님께서 모 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임재 가운데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애굽으로. 

 

우리는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의 조사 통계가 있습니다. 판 매원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고, 25%는 두 번 전화해보고 포기하고, 15%는 세 번 전화해보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즉 88%의 세일즈맨 이 한 통 내지 세 통의 전화를 해보고 판매를 포기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12%는 끈질기게 전화를 해서 결국 판매를 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 12%가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 리 그리스도인의 전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소수의 몇 사람이 전체 교회의 전 도 실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 전도의 사명을 자각하고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결단을 가져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흥미로운 점은 애굽에서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형제를 돌아 볼 생각을 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배척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셨습 니다. 그것을 성경은 “거절하던 그 모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 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35절). 보냄을 받기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 받았던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에서 또 다른 40년 후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모세에게 보이시사 그를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애굽에 보내셨습 니다. 약 40전에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모세를 배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후 다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속량하는 자”라는 말은 모세에게 적합해 보이지 않는 듯 해보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을 속량한다는 것은, 그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대가를 낸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박 윤선). 그러나 모세에게도 이런 칭호를 받을 만하다고 말합니다(박윤선). 그 이유는 모세 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적지 않은 고생을 친히 부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미는 모세가 속량하는 자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인 우리를 속량하시고자 이 애굽과 같은 죄악 된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사 치르신 대가는 예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진정한 속량하는 자는 모세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끝까지 사명을 다한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은혜, 구원을 딛고 삶 속으로”(존 파 이퍼)이란 제목 아래의 글입니다: “윌리엄 캐리는1793년에 영국에서 인도로 배를 타고 건너 갔다. 그는 그곳에서 다섯 살짜리 아들을 잃었고, 그의 아내는 정신적인 질병을 앓았다. 그는 사역을 시작한 지 7년이 지난 후에 첫 회심 자를 만들어 냈으며, 수년 동안 애써 번역 한 것을 화재로 잃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의 휴가도 없이 40년 동안 꾸준 히 사역했다.  …  미국의 제1호 해외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4년에 미얀마로 갔 다. 그는 여섯 살 된 아들을 잃었고, 1년 반 동안 죽음의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의 아 내는 열병으로 죽었다. 그는 정신적인 쇠약으로 고생했고, 첫 회심 자를 만나기까지 5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사명이 생명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이 다.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으로 파송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는 아내를 잃었고 첫 회 심자를 위해 7년 동안 수고했다. 하지만 그는 중단 없이 사역에 임했다. 이들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생명보다 소 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인터넷).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