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하나님

 

 

 

[사도행전 7장 9-16절 말씀 묵상]

 

 

“빵대신 벽돌”란 글을 보면 유명한 뉴스 캐스터였던 데이비드 브린클리의 명언이 나옵니다: “’신은 가끔 우리 앞에 빵 대신에 벽돌을 던져놓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원망해서 그 벽돌을 걷어차다가 발가락 하나가 더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 아 집을 짓기 시작한다.’ 고난이라는 벽돌은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행복의 기초가 될 수도 있고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인터넷). 성경에 고난이라는 벽돌을 인생에 접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물론 욥이 있지만 오늘 본문 사도 행전 7장 9-16절에 나오는 요셉이란 인물 또한 예로 들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고난의 벽 돌을 걷어찬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고난의 벽돌을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 였습니다. 아무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이런 저런 고난을 겪게 된 것입 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뻔하다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팔렸고 애굽에 가서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난의 통로를 지나가야 합니까? 우리는 질고를 아는 자(familiar with suffering)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사43:3). 그리할 때 참된 우리는 고난의 통 로를 믿음으로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겪는 상처가 하나님이 직접 겪는 고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  그러므로 치유한다 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이 더 큰 고통의 ... 한 부 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진정한 치유의 과정은 나의 작은 상처로 말미암아 내 상처 가 온전히 치유될 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큰 상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없이는 예 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내 상처만 바라봅니다. 믿음이 없이는 남들의 상처에 비교해 볼 때에도 내 상처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러한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내 상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아래 내 자신의 연민에만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으로만이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있으면 특히 그의 십자가의 고통과 상처를 직시하며 깨달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큰 고통과 큰 상처 안에 내 작은 고통과 작은 상처가 있음을 깨닫게 되므로 참된 예수님 안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스데반의 연설 두 번째 부분인 사도행전 7장9-16절 말씀 중심으로 “요셉의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요셉의 하나님을 한두 가지로 묵상하면서 그를 우리 삶 속에서 만나 뵙길 원합니다.

 

첫째로, 요셉의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9절을 보십시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 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유인들의 회당에 소속된 자들의 선동으로 사람들에게 거짓 증거를 하도록 만들어 스데반을 신성모독 죄로 산헤드린 법정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 때 산헤드린 법정 의장인 대제사장의 “이것이 사실이냐”라는 질문에 스데반은 답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작은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7장2-8절에서 묵상한 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였고 오늘 본문 9-16절에서 스데반은 “요셉의 하나님”을 말씀하 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여러 조상”, 즉 지금 스데반을 고소한 거짓 증거 하는 유대인들의 “조상들”인 요셉의 10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에 팔았다고 연 설하고 있습니다(9절). 스데반은 연설의 시작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영광의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자신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증거 한 후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 셉을 시기한 것처럼 지금 자기를 고소한 거짓 증거 하는 유대인 형제들이 자기를 시기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비록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지만 요셉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39:2, 3, 23). 어떻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의 삶 속에서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10절 중심으로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10절을 보십시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  여기 서 “그 모든 환난”이란 무엇입니까?(박윤선) 요셉이 그 형제들의 양치는 곳에 찾아갔을 때 에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창37:18-20).  요셉이 어린 몸으로서 외국으로 팔려 가 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습니다(창37:25-28, 39:1).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인하여 옥에 갇 혔습니다(창39:10-20). 죄 없는 몸으로 수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창 39:21-40:23). 그러나 우리 구원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요셉을 건져내셨 습니다. 이렇게 요셉의 가는 길은 환란에서 환란으로 옮겨지곤 하였습니다(박윤선).  우리 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시는 방법의 오묘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 에 환란에서 환란으로 옮겨지는 방법이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 원하시는 방법이 요셉처럼 환란에서 환란으로 옮기시는 것이라는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을… 흥미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 한 말씀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환란에서 환란입니까? 우리는 하나 님께서 우리를 건지신다(구원하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더 이상 고통과 아픔, 환란이 없는 것을 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위하여 부르짖으면서 더 이상 눈물과 고통과 아픔이 없는 구원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한번쯤은 이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구원 의 방법의 결국은 환란이 아니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시편 105편18-19절을 보십시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10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 창세기 41장을 보면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할 수 없었지만 요셉이 그 꿈을 해석했을 때에 바로가 요셉 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환란에서 또 다른 환란으로 옮기실지라도 그는 그 환란을 이겨 나아가도록 은총과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 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13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 라.”  우리가 요셉처럼 환란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환란을 능리 감당케 하십니다. 요셉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에게도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란을 능히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치리자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10절을 보십시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 라”.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요셉을 건져주시되 환란에서 또 다른 환란으로 구원해 주 셨지만 결국 그 모든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과 지혜로 말미암아 결국은 애굽 의 총리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라고 졌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므낫세”는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창41:51)는 의미로 ‘잊어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므나셋라고 첫째 아들을 이름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 이름인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창41:52)는 의미로 ‘두배로 풍성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둘째 아들에게 지어주었습니다.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요셉에의 환란 가운데서도 함 께하시는 가운데 결국은 모든 환란과 고난의 기억들은 잊어버리게 하시고 그에게 애곱의 총 리라는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요셉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 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우리는 환란 가운데 있을지라도 은총과 지혜를 주시는 가 운데 결국 그 환란을 이겨 나아가게 하시고 우리에게 복의 복을 더해주십니다. 그 함께 하 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 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 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우리 임마누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처럼 그를 모함하면서 거 짓 증거하는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도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요셉의 하나님은 궁핍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1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 들어 큰 환난이 있을 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우리 하나님은 궁핍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한 예로 누가복음 15장11-32절을 보면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가 그의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 자기 분깃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을 다 허비했을 때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서 궁핍”해 졌습니다(14 절).  결국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탕자가 거하고 있었던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게 하시므 로 말미암아 탕자를 궁핍케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탕자는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 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하면서 결국은 아버지의 품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요셉이 사는 애굽과 또한 그의 형들이 살 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게 하셨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젓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풍족할지라도 하나 님께서 뜻하셔서 궁핍케 하신다면 가나안 땅 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흉년이 들 수밖에 없습 니다. 애굽도 흉년이 들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요셉을 보내셔서 그에게 지혜와 총명 을 주셔서 야곱의 그의 온 친족들이 다 먹고 살 수 있도록 곡식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 다. 그래서 요셉은 곡식을 얻으러 온 그의 10형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 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47:7-8). 흉 년으로 말미암아 요셉의 형들, 즉 지금 스데반을 고소한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양식이 없으 므로 큰 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11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요셉도 환난을 겪었고 요셉 의 형들도 환난을 겪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요셉의 환난(“모든 환 난”)은 그를 시기한 형들로 말미암아 겪게 된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과 애굽 왕 바로의 집의 치리자로 세우신 반면에 요셉의 형들의 환난(“큰 환난”)은 창조주 하 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결국은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그들과 온 가족 식구들을 이주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12-16절을 보면 양식이 없을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열 아들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므로 말미암아 애굽 에서 자기들의 동생인 요셉을 만나게 되고 바로에게도 들어나고 결국은 요셉이 “그의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14절)을 애굽으로 초청하므로 말미암아 다 애굽으로 이 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게 하시므로 야곱의 그의 아 들들 온 친족들을 다 애굽으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 땅으 로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던 하나님은 야곱의 그의 온 친족들을 이젠 가나안 땅 에서 애굽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큰 환난 가운데서 요셉을 애굽으로 앞서 보내셔서 큰 구 원을 이루신 요셉의 하나님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 한 말을 하였습니다: “흉년든 것이 역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 하여 행하신 일이었다(창41:25). 이 사실들을 보면, 이 세상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중심하고 이루어질 구원을 지향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흉년 조차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우리들을 중심하고 이루어질 구원을 지향하고 움직인다는 이 사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까?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 님은 흉년이든 풍년이든 다 합하여 우리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50장 20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고 애굽 상 인에게 팔므로 말미암아 이런 저런 고난과 환난 가운데 약 13년 세월을 보냈지만 그 모든 환난을 선으로 바꾸시사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케 하셨습니다.

 

이 요셉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성경 고린도 후서 8장9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 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부요케 해주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를 형통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고난의 벽돌에 어떻게 반응하시고 계십니까? 그 벽돌을 걷 어차기 바쁩니까?   아니면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허락하시는 고난의 벽돌들로 하여금 우리를 궁핍케도 하시고 또 한 풍부케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 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창세기 12장1-3절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아브 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섭리하시는 가운데 아브라함의 4대째 후손인 요셉의 시대에 오 셔서는 그와 함께하시므로 고난 가운데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사 결국은 궁핍하였던 그의 형들인 이스라엘 조상들과 식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게 주신 마태복음 16장18절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우리 공동체 가운데 섭리하고 계 십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의 벽돌이 우리 앞에 던져졌다 할지라도 그 벽돌을 발로 차려고 하기보다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우리 교회를 잘 져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궁핍케 하심을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