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도행전 7장 1-8절 말씀 묵상]

 

 

약속은 약속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어머니와 약속을 지켰던 사람 이였습니 다.   어느 날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켄터키에서 온 육군 대령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었습 니다. 육군 대령은 주머니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링컨 대통령에게 한 모금 마시라고 권 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대령, 나는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다오.’ 잠시 후에 대령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링컨에게 권했습니다. ‘아니오. 고맙소, 대령.’   그리고는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술과 담배를 안 하는지 이 유를 말하지요. 내가 아홉 살 정도 되었을 때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를 침대 곁으로 부르 셨다오. 어머니께서는 몸이 매우 편찮으셨소, ‘에이브야, 의사 선생님께서 내가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단다. 나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내가 죽기 전에 평생 동 안 위스키나 담배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다오.’ 나는 그때 어머니께 그렇게 하겠 다고 약속을 드렸소. 그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약속을 지켜 왔다오. 당신은 내가 그 약 속을 깨도 괜찮다고 생각하시오?’ 대령은 링컨의 팔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저도 각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시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여태까지 하신 약속 중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만일 제가 어머니께 그와 같은 약 속을 하고 각하처럼 그것을 지금까지 지켜 왔다면 지금쯤 천 달러 정도 저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인터넷). 약속의 의미는 무엇 입니까?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성숙한 행동이며, 우리에게 약 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약속 은 신성한 것입니다. 약속의 의미는 가치의 비중이 아니라 지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함에 있 습니다(인터넷). 과연 우리에게 약속의 의미를 알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함이 있습니 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1-8절을 보면 스데반의 연설 중에 첫 부분이 나옵니다.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1-8절 말씀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제목을 걸고 한 3가지로 우리 하나님에 대 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 믿음의 성장 과 더불어 우리의 신실한 삶의 책임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2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 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 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사탄의 종노릇하는 “리버니노” 즉, 자유인들의 회당 원들이(6:9) “백성과 장 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고 모함했을 때에(6:12-14) 산헤드린 법정의 의장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물었습니다(7:1).

 

이 질문에 대한 스데반의 긴 연설이 사도행전 7장2-53절에 적혀 있습니다. 그 연설 중 오 늘 본문 중 사도행전 7장 2-8절에서는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스 데반은 지금 자신에 대하여 변호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지금 그 를 고소하고 있는 현시대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유상섭). 특히 그는 2절에서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말하면서 스데반 자신도 여전히 그들 중 하나임을 상기시키면서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으로 이스 라엘 백성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유상섭).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스데반의 “천사의 얼굴”과(6:15)오늘 본문 7장 2절에 말씀하고 있는 “영광의 하나님”과의 연결성(연관성)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 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었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광채”라는 단어는 히 브리어로 '카란'(karan)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광채 나는 얼 굴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된 인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과 같이 보였다는 것은 그 얼굴이 광채가 났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스데반은 모세처 럼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서 반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2절 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였다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스데반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연설하는 스데반은 자기를 고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도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스데반은 진정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반면에 그를 고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우 리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영적인 후손이 아닙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영적 후손들입니까?   만일 믿음으로 “예” 라고 대답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얼굴과 삶을 통해서 “영광의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얼굴과 삶을 통하여 반영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모세가 빛나는 얼굴, 즉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은 모세는 하나 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며 그 명령을 받아 순종했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간 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욕구와 생각과 행동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방식으 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주님 의 명령(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면서 들려주시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얼굴과 삶을 통하여 반영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 들려주신 영광의 하나님의 음성(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3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 로 가라 하시니.”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친척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 … 가라!” 이 명령을 순종하는 게 과연 쉬웠겠습니까? 그 누가 안정된 생활과 정든 고향을 영영 떠나 이역에서 나그네로 유리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를 실행하게 된 것 은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미래의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전연 모르면서도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말씀으로 미래의 모든 문제들을 벌써 다 해결한 듯이 생각하고 유쾌하게 그 길을 떠났습니다(박윤선).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붙잡 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이며(창12:4), 그 움직임에 있어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줄 믿으며, 그 행동의 결과로 모든 복된 열매를 얻을 줄 믿음입니다(히11:8 참조)(박윤선).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더 이상 말로는 아니 될 것입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어두운 세상 에 들어내야 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옮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4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 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 느니라.”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 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3절). 그래서 그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갈대아 땅을 떠나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하란에 거하다가 그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4절).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보일 땅”과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 그 땅에 스데반과 또한 그를 고소하는 자유인들의 회당 원 들과 모함하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땅에서 불러내시사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습니다(4절).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 대아 땅에서 불러내셔서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축복의 말씀은 창세기 12장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은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 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자 갈대아 땅에서 불러내셔서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옮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요한복음 5장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복음(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 명으로 옮긴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 는 더 이상 영원한 죽음의 길인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길인 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들은 우리 삶 속에 모든 우상들 을 옮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신 이유는 물론 복주시기를 원하셔서 인데 그 복중에 하나는 우상 숭배의 도시에서 아브라함을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있었던 하란 땅은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하란은 아람인의 도시로서 달의 신인 “Sin-and-Nikkal” 우상을 섬겼던 곳입니다(Baker’s Encyclopedia of the Bible). 하나님께서 우상도시인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 로 옮기셨습니다. 사무엘상 7장 3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 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우리 마음속에서 모든 우상을 제하고(옮기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성경 욥기 22장 23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 리면 다시 흥하리라.” 우리는 우상을 멀리하며 또한 불의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미 불의의 삶에서 의의 삶으로 이미 옮긴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의 삶을 살아 야 합니다.   좀 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천국의 삶을 부분 적으로나마 살아가 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애굽과 같은 이 죄악 된 세상에 서 천국으로 옮긴바 된 천국 백성 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부분적으로나마 천국 생활을 한다는 것 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 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 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신 후에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서 발붙일 만한 땅도, 이 땅을 상속할 씨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400여년 후에야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6-7절, 창15:13-16)(유상 섭, 박윤선). 그리고 그 가나안 땅에서(7절) 하나님을 섬기리라(경배하리라)고 하나님은 아 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특성을 박윤선 박사님을 한두 가지 로 말하였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 주시지 않으신다는 사실 입니다. 약 400년 후에 약속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런 현실적 근거는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상대하고 미래의 큰 계획의 실현을 약속하신다는 사 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으나 장차 그의 자손이 많을 것과 또한 그들에 게 가나안 땅이 소유된 것을 언약하셨습니다(창15:5, 16).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시며 또한 우리에게도 이러한 단시일 내에 이루어 주시지도 않는 비현실적 인 약속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이런 방법으로 약속해 주시고 그 약속이 성 취된 후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전능을 알도록 하시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다운 믿음 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박윤선).

 

과연 우리는 믿음다운 믿음이 있습니까? 과연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주님께서 약 속하신 바를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까? 과연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약속 성취하심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 속의 말씀은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6-7절을 보면 약 400년 후에나 성취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5장7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175세 때 죽습니다. 그렇 다면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도 한 225년 후에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말입 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을 못보고 죽었다는 결 론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세대에 이뤄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붙 잡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는 가운데서 흔들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의 받지 못하였으되 그 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습니다(히11:13).   이것이 바로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믿음을 따라 죽는 것, 약속의 내 세대에 받지 못하였을지라도 멀리서 그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것 을 보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이러한 믿음다운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할레의 언약을 받으므로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 8절을 보십시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 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여기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 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로 할례를 행하도록(창 17:10-14)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이 할례를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 삭에게 행하였고 계대 적으로 그 후손들에게 행하도록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야곱 에게, 야곱은 그 열 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이 언약의 표인 할례를 계대 적으로 실행하게 하셨습니 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인 아브라함 자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것과 그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구원의 복을 받는다는 것(창12:1-3, 18:18, 22:17-18)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기억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이 언약의 표인 할례가 있었 기에 아브라함은 믿음다운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약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 우리들은 어떠한 할례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11절을 보십시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 그리스 도의 할례는 로마서 2장29절 말씀처럼 이면 적에 한 것이요 성령님께서 마음에 한 것입니 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 니한 것이라 ….” 이 마음에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4장21절을 보십시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또한 성경 빌립보서1장6절을 보십시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더 나아가 서, 마음에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는 인간적으로 소망이 없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 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오히려 더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롬4:20).

 

“불가능을 넘어서는 약속”이란 기사를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굳게 만난 사람은 멍청하고 무력한 것처럼 보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 속 앞에서는 자신의 무력함이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잡음으로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매사에 계산 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철저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남은 여정을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맡겨야 들어갈 수 있 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위대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무 력함이라고 하는 힘을 통해 위대해진 것입니다. 약속과 만나는 사람은 ‘불가능’과 만나는 사람입니다. 모든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약속을 붙잡는 자는 그 속에 숨어 있는 ‘가능’을 봅 니다”(인터넷).

 

 

 

보이시고, 옮기시며,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불성실한 죄인에게도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나아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