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은?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 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현대인의 성경) “이 때에는 신자들의 수가 많이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이스 말을 하는 외국 태생의 유대인들이 매일의 구제 대상에서 자기들의 과부들이 제외된다고

히브리말을 하는 본토 유대인들에게 불 평을 하였다.”] (사도행전 6장 1절)

 

 

어젯밤 오늘 새벽기도회 설교를 준비하려고 오늘 읽을 성경 말씀인 사도행전 6장 을 펴서 1절부터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 시선은 1절에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리고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 말씀은 바로 “그 때에”라는 단어였습니다(6:1). “아니 ‘그 때’가 어느 때 이길래 제자(신자들)가 더 많아졌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 서 저는 그 전장인 사도행전 5장을 살피다가 17절부터 나오는 사도들이 대제사장과 그와 한패인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받은 능욕에 대한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게 가두었고(18절) 또한 공회 앞에 세워(27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이상 가르 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였습니다(28절). 심지어 그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 여 사도들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33절).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습니다(40절). 그 때에 놓임을 받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으면 그 후로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 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41-42절). “그 때에” 신자들의 수가 많이 불어 난 것입니다(6:1). 결국 “그 때”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환난과 핍 박을 받았던 때요 동시에 “그 때”는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도리어 더욱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하였었던 때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 졌습니다. “그 때”에는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욕을 받는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므로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졌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때’는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자신에게 던져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신자들의 수가 자꾸만 줄어든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듣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 말씀에 비춰볼 때 저는 그 원인을 한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핍박을 받지 않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거나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반대로 한국 교회에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지 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그 때에” 성 령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교회에 많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2:47).

 

둘째로, 제가 생각하게 된 말씀은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졌을 때

초대 교회 안에 원망(불평)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6:1).

 

헬라 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들을 원망하였습니다(6:1).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교회 안에 신자들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 질수록 갈등 및 불평도 많아질 확률이 많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호세아 4장 7절 때문입니다: “너희 제사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에게 더 많이 죄를 범하니 내가 너희 영광을 수치로 바꿀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호세아 4장7절 말씀을 지 금 이 때에 적용해 볼 때 목사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죄를 범하므로 하 나님께서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기자처럼 목사님들이 겸손히 하나님께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시115:1)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의 칭찬에 착각하여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여 자기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큰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목사님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고 계십니다.  그러니 결 코 목사님들이 많아진다는 것이 꼭 좋은 현상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 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여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지는 것은 좋 은 현상이겠지만 신자들도 신자들 나름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빌1:27)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지면 질수록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많은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지 못하고 오히려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허영심) 서로 다툰다면(2:3, 4:2)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나쁜 현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치를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런데도 별의 별 인위적인 방법으로 전도(?)하여 교인 수를 많아지게 하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범죄 할텐데 말입니 다(호4:7).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우리 목사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교회에서 성도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집에서도 우리 가족 식구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온 교회가 주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견고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하며 또한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그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하여 협력하 는 과정 중에 우리는 구제 사역도 협력해서 신실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요즘 같은 지역 사회를 섬기려고 노력하는 중에 교회 외부적인 구제 사역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교회 내부적인 구제 사역도 지혜롭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시 험에 드는 성도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사랑으로 지혜롭게 구제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잘 감당하되 구제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 으려고 구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6:1).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2-4절에서 이 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 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 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하심을 얻고자 하였는데 그들이 힘써 지키고자 했던 율법 중 하나가 바로 구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구 제함에 있어서 외식으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보이게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 처럼 그리 구제하지 말고 은밀하게 구제하라고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한 삶은 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을 은밀하 게 구제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의인이 구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로 말미암은 것이지 바리새인들처럼 의를 얻고자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도 바리새인들처럼 의를 얻고자 구제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구제함에 있어서 공로의 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식으로 구제 사역을 겸손히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 때에”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행2:47, 현대인의 성경).

 

마지막 셋째로, 제가 생각하게 된 말씀은 교회 안에 원망(불평)이 있었을 때

열두 사도들이 안수 집사 일곱 명을 세우고 자기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 씀 사역에 힘”썼다는 것입니다(6:3-4).

 

주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경우 담임 목사님이나 부목사님들 입장에서는 그 교인들 사이에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들이 왜 불평하 는지, 그들의 불만족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들을 만족케 할 수 있을지 등등 고민하면서 어 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 행전 6장 1-4절을 보면 헬라 파 유대인들이 히브리 파 사람들을 원망(불평)했을 때(1절) 열 두 사도들은 그들의 불만족을 어떻게 만족시켜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헬라 파 유대인들이 나 히브리 파 유대인들이나 서로 화목하게 잘 지내도록 할 것인가 라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열두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우리가 구제 하느라고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현대인의 성 경)](2절)라고 말한 후 그 제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을 택하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절). 왜 열두 사도들은 그리 말했습니까? 그 이유는 열두 사도들은 그 일곱 사람들을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여(6절) 구제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3절) 자기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했기 때문입 니다(4절). 그 말을 들은 “모든 신자들은” 열두 사도들의 제안을 기쁘게 여겼습니다(5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5-6절).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6절).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 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그렇게 해서 하나 님의 말씀은 널리 전파되었고 예루살렘에서 믿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제사장들 도 많이 믿게 되었다” (현대인의 성경)].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 고 말씀하 고 있는데 7절에 와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 고 성경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 결국 외부적으로 환난과 핍박과 내부적으로 원망과 불평이 있는 가운데서 초대 교회는 외부적으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교 회 조직을 질서 있게 정돈하여 사도들이 할일과 안수 집사들이 할일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각자의 일을 감당하는데 헌신하므로 신자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교회 안에서 일꾼이 적습니다(마9:37). 왜 교회 안에 일꾼이 적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생활, 더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는 가운데 주님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며 희생하고자 하는 헌신도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추수할 일 꾼을 보내 주시길 주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38절).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일꾼들을 보내 주시길 주님께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꾼들,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일꾼들, 추수하는 즐거움을 알고 그 즐거움을 누릴 줄 아 는 일꾼들(사9:3) 그리고 충성된 자들로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일꾼들(잠25:13)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길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서 자격이 너무나 미달 되는 사람들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결정을 합리화시키는 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을 교회 일꾼으로 세우면 지금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잘할 꺼야’, ‘비록 지금은 믿음이 부족하지만(성품도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저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면 믿음도 자라나서 더욱더 열심히 봉사할 꺼야’ 등등.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 직분을 맡았을 때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대로 믿음도 자라나고 성품도 변화되면서 열심히 봉사 잘 하나요? 혹시 직분 자를 잘못 세워서 그 사 람들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것은 교회에서 직분 자를 함부로 세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일꾼이 부족하고, 아무리 일꾼이 절실히 필요해도 상황에 이끌려 자격 미달된 사람을 직분자로 세 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 되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확신이 점점 드는 이유는 여기 저기 교회에서 창립 기념일이던지 특별한 날에 장로님, 안수 집사님, 권사님들을 세우는 기독교 신문 광고들을 보면서 요즘 어느 정도 나이가 되고 교회 다니는 분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다 장로님이고 안수 집사님이 고 권사님들 같은데 왜 이렇게 성품이 예수님을 닮지 못했고 왜 이렇게 신자답지 못해서 교 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교회 밖에서 가정이나 회사나 직장에서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 에게 욕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이유가 이렇게 한두 가지 이겠습니까. 슬픈 현실은 교회 안에서 갈등과 다투는 사람들을 보면 주로 다 목사님, 장로님, 안수 집사님, 권사님들 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투고 싸우라고 직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닐 텐데 말입 니다. 우리는 직분 자를 세움에 있어서 참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3절 에서 열두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 일곱을 택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만을 생각해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안수 집사님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물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하지만 적어도 교인들에게 칭찬 받는 사 람들을 택해야 하지 않나요? 디모데전서 3장 7절을 보면 “감독” 또는 장로(가르치는 장로 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인 장로)는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아야 합 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집사들도 단정하고 한 입에 두 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좋아하지 않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한다(현대 인의 성경)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실제로 술을 좋아하는 안수 집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길래 “안주 집사”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성경은 안수 집사 님과 될 사람은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10절) 교인들에게 칭찬을 받기보다 책망을 받는 사람을 교회 가 안수 집사로 섬기게 한다면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성경은 안수 집사들의 아 내들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내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남을 헐뜯지 않 고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사람이어야 합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요즘은 안수 집사님들의 아내들이 자기 남편을 장로로 만들고자 교회 안에서 로비인지 선거인지 같 은 것도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래서 제가 생각하는 교회 안에서의 제일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장로”님들입니다. 여기서 “장로”님들이란 바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님들과 치리하는 장로님들인 장로님들입 니다. 장로교회 안에서만 자라난 저로서는 장로교회에 문제는 장로님들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장로교 조직에 있어서 목사님과 장로님들로 구성된 “당회”에서 왜 이 리 말이 많고 갈등이 많고 다툼이 많은 것입니까. 목사님과 장로님들하고의 갈등 뿐만 아 니라 왜 장로님들끼리도 서로 다투는 것입니까. 왜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까(3절). “감독”(목사, 장로)은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3절) 왜 돈의 욕심에 스스로 노예로 전략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 가정도 다스릴 줄 모르는 목사, 장로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5절, 현대인의 성경) 더 이상 말하 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인 우리 목사님들의 책임이 제일 큽니다. 장로님들이나 안 수 집사님들의 책임보다 우리 담임 목사님들의 책임이 제일 큽니다. 제대로 지도(lead)하 지 못해서 입니다.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입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것 입니다(할 줄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잘할 줄 아는 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안다면 더욱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열두 사도들처럼 “오 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서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우리 목사님들 은 현실과 상황 탓 속에서 이런 저런 사역에 너무나 바빠 기도와 말씀 사역을 힘쓰지 못하 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안 좋은 일들을 보면 조금은 알 수 있지 않나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먼저 우리 목사님들은 열두 사도들처럼 교회의 갈등과 어려움, 심지어 위기를 통해서라도 마땅하 지 아니한 것들(바람직하지 않는 것들)을 깨달아야 합니다(행6:2). 그런 후 우리는 교회 안 에 갈등과 어려움, 심지어 위기를 통해서라도(그런 것이 없다면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위기의식을 가져서라도) 우선순위를 바로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들 처럼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4절). 그러기 위해서 또 한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목사님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3절) 장로님과 안수 집사님들에게 위임할 일들은 위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 파되어 믿은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야 합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에 우리 입 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찰 것입니다(시126:2상). “그 때에” “다른 나라들은 우리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2절 하, 현대인의 성경).

 

 

 

신자들의 수가 더 많아질 때에 오는 교회의 어려움과 심지어 위기를 통해서라도 더욱더 기 도와 말씀 사역에 전혀 힘을 쓰는 계기가 되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직분자로서 우선순위를 바로하며 각자의 책임과 위임받는 일들을 믿음으로 성령님의 인도 하심 따라 신실하게 잘 감당하여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주님께 칭찬 받기를 사모하면서)